그런데 이번 6·3 지방선거에서 도저히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있어서는 안 될 대형 참사가 벌어졌다. 서울 송파구와 광진구를 비롯한 일부 수도권 핵심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바닥나 투표가 중단되거나 무한정 지연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행정 시스템과 정보통신 기술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선거 역사에서 이처럼 황당하고 부끄러운 오점이 언제 있었던가.
소식을 접한 많은 국민은 처음엔 제 귀를 의심했다. 선거 당일 흉흉하게 떠도는 가짜뉴스가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신성한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일터와 가정에서 시간을 쪼개 투표소를 찾은 유권자들은 투표용지가 없다는 황당한 안내를 받으며 수십 분, 길게는 몇 시간씩 줄을 서서 대기해야 했다. 참다못한 일부 유권자들은 결국 소중한 한 표를 포기한 채 분통을 터뜨리며 발길을 돌렸다. 국가가 국민의 참정권을 폭력이나 강압이 아닌, ‘준비 부족’이라는 한심한 행정 무능으로 박탈한 셈이다.
도대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사태가 커지자 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가 내놓은 해명은 더욱 가관이다. 선관위 측은 “예상보다 투표율이 너무 높게 나와 현장에서 수요를 맞추지 못했다”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 해명은 법치국가의 기본 상식은 물론이고 보통의 일반 국민이 가진 보편적 이성으로도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투표율이 예상보다 높아지거나 낮아지는 것은 선거 행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변수다. 더욱이 선거관리라는 고유의 목적을 지닌 헌법기관의 핵심 업무는 바로 그러한 모든 예외적 상황과 최악의 시나리오에 완벽하게 대비하는 것이다. 비가 올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우산을 준비하는 것이 상식이듯, 투표율이 100%에 육박하더라도 모든 유권자가 표를 던질 수 있도록 충분한 투표용지를 선제적으로 확보하는 것은 선거 행정의 초보적인 의무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이미 확정된 유권자 명부가 존재한다. 어느 동네, 어느 투표소에 몇 명의 유권자가 적을 두고 있는지 선관위는 시스템을 통해 누구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그럼에도 특정 지역 투표소에 유권자 수의 절반 수준에 불과한 투표용지만 공급했다는 사실은 어떤 핑계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명백한 직무유기다. 일각에서 나오는 “남아서 폐기되는 투표용지의 예산을 아끼려다 벌어진 일”이라는 식의 변명은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단언컨대, 투표지 몇 장을 폐기하는 비용보다 단 한 명의 국민이 가진 참정권의 가치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무겁고 소중하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단순히 현장 공무원 몇 명의 행정 착오나 실수가 아니다. 국민의 기본권 중의 기본권인 헌법상 참정권이 국가기관에 의해 침해당한 중대한 민주주의 훼손 사건이다. 민주주의 체제 아래서 투표권은 주권자가 국가 권력을 통제하고 참여하는 유일무이한 열쇠다. 한 표의 가치는 곧 국민주권의 크기와 같다. 그런데 국가 권력의 정당성을 감시해야 할 선관위가 오히려 부실한 준비로 국민의 투표권 행사를 가로막고 방해했다면, 이는 결코 가볍게 웃어넘길 해프닝이 아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반복되는 부실 관리가 선거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신뢰를 근본적으로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는 점이다. 선거는 결과의 공정함보다 과정의 투명성과 절차적 신뢰가 선행되어야 한다. 아무리 완벽하고 공정한 개표 결과가 도출된다 한들, 국민이 그 과정을 믿지 못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면 민주주의의 기초는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
실제로 최근 몇 년간 선관위가 보여준 행보는 실망의 연속이었다. 지난 선거에서의 이른바 '소쿠리 투표' 논란부터 시작해 투표지가 외부로 반출되는 인재가 발생했고, 조직 내부적으로는 고위직 자녀들의 특혜 채용 비리 의혹까지 터져 나오며 국민적 신뢰를 이미 바닥까지 잃은 상태였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 속에서 또다시 투표용지 부족이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대형 사고가 터지니, 사회 일각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부정선거 음모론과 각종 의혹을 제기하는 것도 어찌 보면 자업자득이다.
물론 필자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제기되는 맹목적인 부정선거 음모론에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건강한 민주주의는 차가운 사실과 객관적인 증거 위에서만 올바르게 작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점은, 선관위가 보여준 연속적인 실책과 안일함이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유발하는 의혹의 가짜뉴스들이 자라날 비옥한 토양을 지속적으로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근거 없는 의혹을 양산하는 세력도 문제지만, 그 의혹에 땔감을 던져주며 빌미를 제공한 국가기관의 책임 역시 결코 가볍지 않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천하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일에서 시작된다(天下難事 必作於易)”고 역설했다. 거대한 댐이 무너지는 것은 정밀한 균열이 아니라 사소한 틈새 하나를 방치했을 때다. 투표용지를 인쇄하고 수량을 맞춰 현장에 배부하는 일은 거창한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나 첨단 인공지능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 아니다. 선거 행정의 가장 밑바닥에 존재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런데 그 가장 기초적인 기본이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다.
『논어』에서도 공자는 “그 자리에 있으면서 그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그 직분에 있지 않은 것과 같다”고 꾸짖었다. 막강한 권한과 독립성에는 그에 상응하는 무거운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 법이다. 선관위는 선거의 공정성을 위해 헌법이 엄격하게 독립성을 보장해 준 초연적 기관이다. 권한이 강한 만큼 그들이 가져야 할 책임 의식은 일반 행정 부처보다 몇 배는 더 무겁고 철저해야 마땅하다.
이번 사태는 선관위가 관례대로 사과문 한 장 발표하고 적당히 구렁이 담 넘어가듯 뭉개고 끝낼 사안이 결코 아니다. 독립적인 외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철저한 진상조사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도대체 어느 선에서 어떤 기준으로 투표용지 발행 수량을 제한했는지, 현장에서 용지가 부족하다는 비명이 터져 나왔을 때 왜 제때 보고와 추가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비상 대응 매뉴얼은 작동했는지 전 과정을 국민 앞에 한 치의 의혹도 없이 낱낱이 밝혀야 한다.
아울러 이번 기회에 선관위의 운영 시스템 전반을 완전히 뜯어고치는 구조적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 ‘헌법상 독립기관’이라는 견고한 방패 뒤에 숨어, 감사원의 감사를 거부하거나 외부의 정당한 비판을 무력화하면서 책임은 지지 않는 지금의 비대하고 비효율적인 관료주의 구조를 전면 점검해야 한다. 국민의 신뢰를 상실한 독립기관은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진짜 적은 한 번의 실수가 아니다. 그 실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반성하지 않고, 결국 같은 실수를 부끄러움 없이 반복하는 나태함이다. 신뢰라는 탑은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눈물겹게 쌓아 올려야 하지만, 무너져 내리는 것은 단 하루, 한순간의 방심으로 족하다.
이번 6·3 지방선거에서 울린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순진한 행정 착오가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근간이 썩어가고 있다는 엄중한 경고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선관위는 이번 참사를 계기 삼아 조직의 명운을 걸고 뼈를 깎는 자기 혁신과 인적 쇄신에 나서야 한다. 그것만이 유권자의 소중한 참정권을 지키고 부서진 선거의 신뢰를 간신히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다.
민주주의는 정치인들의 거창한 구호나 헌법 조문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줄을 서서 내 표를 기다리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중한 참정권을 단 하나도 흘리지 않고 빈틈없이 받아내 지켜내는 현장의 땀방울에서 시작된다. 선관위는 이번 사태의 치욕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위대한 대한민국 유권자들 역시 선관위의 향후 행보를 두 눈 부릅뜨고 똑똑히 지켜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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