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일보] 화려한 조명 뒤에는 언제나 짙은 그림자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전 세계 인공지능 반도체 시장을 제패한 SK하이닉스의 경이로운 실적 뒤에서 SK그룹은 창사 이래 가장 혹독하고 치열한 사업 구조 재편을 진행하고 있다.
이른바 '리밸런싱(Rebalancing)'으로 불리는 이 거대한 포트폴리오 조정 작업은 단순한 계열사 축소를 벗어나 그룹의 생존과 100년 미래를 담보하기 위한 최태원 회장의 가장 냉철한 결단이다.
최근 수년간 SK그룹은 '딥체인지'라는 기치 아래 배터리(Battery)와 바이오(Bio) 그리고 반도체(Chip)를 뜻하는 이른바 BBC 산업을 중심으로 영토를 폭발적으로 확장했다. 친환경 에너지와 첨단 소재 분야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부으며 미래 준비에 사활을 걸었다.
그 결과 계열사 수는 200여 개까지 급증하며 외형은 거대해졌으나 글로벌 경기 침체와 고금리 기조가 장기화하면서 막대한 투자금 회수에 경고등이 켜졌다. 특히 전기차 수요가 일시적으로 정체되는 캐즘 현상이 겹치면서 방대한 투자 포트폴리오는 그룹 전체의 묵직한 재무적 부담으로 돌아왔다.
최 회장은 반도체가 벌어들이는 막대한 현금에 취해 그룹의 근본적인 체질 약화를 방치하는 이른바 반도체 착시 현상을 가장 크게 경계했다. 팽창 일변도의 전략을 즉각 멈추고 방대해진 조직을 효율적으로 압축하는 과감한 군살 빼기에 돌입했다.
이 역사적 리밸런싱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 바로 2024년 말 전격적으로 단행된 SK이노베이션과 SK E&S의 초대형 합병이다. 자산 규모 100조 원에 달하는 거대 에너지 기업의 탄생은 단순한 계열사 통합이 아니다. 알짜 수익을 내는 E&S의 안정적인 현금창출력을 활용해 자금난에 빠진 배터리 자회사를 구출하겠다는 치밀한 재무적 승부수였다.
실제로 그룹의 핵심 미래 동력인 배터리 사업을 담당하는 SK온(대표 이석희)은 전기차 시장의 한파 속에서 힘겨운 보릿고개를 건너고 있다. 하지만 SK는 이를 뼈아픈 실패가 아니라 새로운 산업이 안착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일시적 성장통으로 진단한다.
합병을 통해 든든한 실탄을 확보한 SK온은 수율 개선과 조직 효율화 등 강도 높은 운영 개선(Operation Improvement)에 집중하며 다가올 전기차 반등장을 숨 죽여 준비하고 있다. 리튬인산철(LFP) 배터리 등 제품군을 다변화하고 글로벌 생산 기지의 최적화를 통해 혹독한 캐즘을 돌파할 체력을 비축하는 중이다.
배터리가 험난한 계곡을 지나고 있다면 또 다른 성장 축인 바이오 산업은 묵묵히 괄목할 만한 결실을 맺고 있다. 신약 개발부터 상업화까지 독자적으로 수행하는 SK바이오팜(대표 이동훈)은 독자 개발한 뇌전증 신약 엑스코프리의 미국 시장 안착을 바탕으로 탄탄한 흑자 기조를 굳혔다.
의약품 위탁개발생산(CDMO)을 담당하는 SK팜테코 역시 글로벌 시장에서 입지를 단단히 다지고 있다. 신약 개발은 평균 10년 이상의 막대한 시간과 천문학적인 자본이 투입되는 인내의 영역이다. 단기 실적에 연연하지 않고 수십 년을 내다본 총수의 뚝심 있는 장기 투자가 비로소 글로벌 블록버스터급 신약 창출이라는 쾌거로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그룹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재편 작업의 정신적 기저에는 선대 회장이 남긴 고유의 경영 철학인 SKMS가 자리 잡고 있다. 최 회장은 대내외적 위기가 고조되자 임직원들에게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자"며 SKMS의 실천을 강력하게 주문했다.
호황기에 잊고 지냈던 방만한 경영을 뼈저리게 반성하고 철저한 성과주의와 낭비 없는 효율적 운영을 통해 기업 본연의 경쟁력을 되찾으라는 준엄한 지시였다. 투자 중심의 양적 팽창에서 철저한 운영 개선을 통한 질적 성장으로 그룹의 경영 기조가 완벽하게 전환된 이유다.
SK는 결코 반도체 하나에만 기대어 생존하는 외발자전거가 아니다. 그룹이 진정한 글로벌 일등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반도체의 압도적 독주와 함께 친환경 에너지 전환과 생명과학 포트폴리오가 반드시 균형 있게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현재 SK가 겪고 있는 치열한 구조조정과 뼈를 깎는 비용 절감은 전통적인 탄소 중심의 거대 기업이 지속 가능한 친환경 첨단 제국으로 진화하기 위해 반드시 치러야 할 값비싼 통과 의례와 같다.
위기는 언제나 위대한 기업을 감별하는 가장 정확한 리트머스 시험지다. 과거 선경직물이 석유파동의 파고를 넘어 거대 에너지 화학 기업으로 진화했고 외환위기의 한파 속에서 정보통신 제국을 세웠듯 SK는 언제나 벼랑 끝에서 가장 폭발적인 도약을 이뤄냈다.
방대한 제국의 영토를 매섭게 정비하며 숨을 고르고 있는 최태원 회장의 과감한 리밸런싱 전략이 배터리와 바이오의 화려한 비상으로 이어져 그룹의 다음 100년을 지탱할 완벽한 삼각편대를 완성할 수 있을지 전 세계 산업계가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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