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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노란봉투법' 시행 첫날의 혼돈…교섭 질서의 공백이 더 큰 문제다

2026-03-11 08:22:00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 법률) 시행 첫날인 10일 서울 세종로에서 열린 민주노총 투쟁 선포대회에서 집회를 마친 민주노총 조합원 등이 행진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경제일보] 강산이 세 번 바뀌는 세월 동안 산업 현장의 갈등과 화해를 지켜보며 기록해 왔지만 오늘처럼 노동의 권리와 기업의 경영이 정면으로 충돌하며 산업 질서 자체가 흔들리는 장면을 마주하는 일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른바 ‘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이 3월10일 본격 시행됐다. 법 시행 첫날부터 대학 청소 노동자, 택배 노동자, 공항 자회사 노동자들이 일제히 “진짜 사장 나와라”를 외치며 원청과의 직접 교섭을 요구하고 나섰다. 노동계는 이를 오랜 숙원이었던 ‘노조 할 권리’의 확대라고 평가하지만 경영계는 교섭 대상의 무한 확장과 파업 리스크 확대를 우려하며 깊은 불안을 드러내고 있다.

문제는 법 시행과 동시에 산업 현장에서 나타난 혼란의 속도와 규모다. 제도적 준비와 사회적 합의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법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교섭 질서의 공백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특히 중동 정세 불안에 따른 고유가, 글로벌 공급망 불확실성, 성장 둔화까지 겹친 상황에서 산업 현장의 갈등이 급격히 확대된다면 그 파장은 단순한 노사 문제를 넘어 국가 경제 전반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 필요한 것은 찬반의 진영 논쟁이 아니라 새로운 교섭 질서를 신속히 세우는 일이다.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는 ‘사용자 범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다. 개정법은 사용자를 “근로조건에 실질적이고 구체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로 확대했다. 취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범위가 모호한 채 현장에 맡겨진다면 분쟁은 결국 법정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교섭 대상이 어디까지인지 불분명하다면 기업은 생산보다 협상에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되고 산업 현장은 상시적 갈등 구조로 빠질 가능성이 높다. 법이 새로운 권리를 열어준 만큼 정부는 그 권리가 작동할 제도적 기준을 제시할 책임이 있다. 업종별 계약 구조와 산업 특성을 반영한 구체적 가이드라인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

또 하나 필요한 것은 ‘다층적 교섭 구조’의 제도화다. 원청이 하청 노동자의 모든 고용 책임을 직접 떠안는 방식은 현실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고 현재와 같은 단절된 하도급 구조가 유지된다면 갈등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원청·하청·노동자가 함께 참여하는 공동 협의 구조를 통해 임금과 안전, 복지 문제를 단계적으로 논의하는 교섭 체계를 만드는 것이 현실적 대안이다. 특히 공공기관과 대형 플랫폼 산업부터 이러한 협의 모델을 도입해 산업 전반으로 확산시킬 필요가 있다. 갈등을 거리와 법정이 아니라 제도적 협의 테이블에서 해결하는 노사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

노동계 역시 권리 확대에 상응하는 책임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손해배상 청구 제한이 무제한적 투쟁의 면허가 될 수는 없다. 시민의 일상과 산업 활동을 장기간 마비시키는 방식의 투쟁은 결국 사회적 지지를 잃게 된다. 권리는 사회적 신뢰 속에서 유지된다. 감정적 대립이 아니라 데이터와 정책을 중심으로 한 교섭 문화가 자리 잡을 때 노사 관계 역시 한 단계 성숙할 수 있다.

노란봉투법은 이미 시행됐다. 이제 중요한 것은 정치적 논쟁이 아니라 현장에서 작동할 질서를 만드는 일이다. 정부는 중재자로서 분명한 기준을 제시해야 하고 기업은 변화된 제도에 맞는 협력 전략을 마련해야 하며 노동계는 책임 있는 권리 행사를 통해 사회적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

기업이 살아야 일자리가 유지되고 노동자가 안정되어야 경제가 성장한다. 노사 갈등이 산업 경쟁력을 갉아먹는 소모적 대립으로 흐를지, 새로운 협력 질서를 만드는 계기가 될지는 지금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노란봉투법 시행 첫날의 혼란이 산업 갈등의 확산 신호가 아니라 한국 노사 관계가 한 단계 성숙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