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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니지의 아버지' 김택진, 'SOFT'를 버리다… 30년 만의 승부수

선재관 기자 2026-04-03 10:19:32

'SOFT' 지운 엔씨, 30년 만의 '생존 도박'

'리니지' 넘어설 'Next & Creative' 가능할까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

[경제일보] 1997년 ‘리니지’의 아버지 김택진이 세운 엔씨소프트(NCSOFT)가 창사 30주년을 코앞에 두고 스스로의 정체성의 상징이었던 ‘SOFT’를 지웠다. 

지난 2일 엔씨(NC)로의 사명 변경을 공식화하며 김택진·박병무 공동대표는 “미래(Next)에 대한 도전과 창의성(Creative)을 바탕으로 다음 세대를 위한 새로운 가치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단순한 이름 바꾸기를 넘어 30년간 한국 게임 산업의 절대 강자로 군림해 온 엔씨가 ‘MMORPG 명가’라는 낡은 갑옷을 벗어던지고 ‘종합 콘텐츠·기술 플랫폼 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결사의 의지가 담겨 있다.

엔씨가 ‘SOFT’라는 단어를 떼어낸 배경에는 ‘리니지 라이크’라는 달콤하고도 치명적인 성공 공식이 자리 잡고 있다. 엔씨는 리니지 시리즈로 수십 년간 막대한 현금을 벌어들였다. 그러나 이 성공은 역설적으로 엔씨를 ‘확률형 아이템’과 ‘페이투윈(Pay-to-Win)’이라는 비판의 중심에 서게 했다. 신작을 내놓아도 ‘또 리니지’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고 이는 브랜드 이미지 하락과 젊은 이용자층 이탈이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2024년 출시한 야심작 ‘쓰론 앤 리버티(TL)’의 부진은 이러한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엔씨는 TL을 통해 리니지식 과금 모델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결국 엔씨는 최근 몇 년간 개발 조직의 비효율성과 방만한 경영 구조에 대한 내부 비판에 직면하며 2024년 창사 이래 최대 규모의 구조조정을 단행해야만 했다. ‘SOFT’를 지운 것은 이러한 과거와의 단절을 상징한다. 더 이상 소프트웨어 개발에만 매몰되지 않고 플랫폼과 콘텐츠, 기술을 아우르는 거대 생태계로 진화하겠다는 출사표인 셈이다.

◆ ‘Next & Creative’가 그리는 엔씨의 미래

향후 ‘엔씨(NC)’는 AI 기반 기술 플랫폼으로의 전환에 속도를 낼 전망이다. 엔씨는 이미 자체 거대언어모델(LLM) ‘바르코(VARCO)’를 개발해 게임 제작 과정의 자동화를 꾀하고 있다. AI가 시나리오를 쓰고 캐릭터를 디자인하며 게임 내 NPC(Non-Player Character)의 행동을 지능적으로 제어하는 시대는 이미 도래했다. 엔씨는 이러한 AI 기술을 단순히 내부 개발 효율을 높이는 데 그치지 않고 외부 개발자들이 엔씨의 플랫폼 위에서 게임을 만들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 OS’로 확장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 사명에서 ‘SOFT’를 뺀 것은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기술을 통해 즐거움을 ‘유통하는 플랫폼’이 되겠다는 선언으로 해석된다.

장르와 플랫폼의 전면적 다변화 또한 필수 과제다. 엔씨는 PC MMORPG와 모바일 시장에 편중된 매출 구조를 탈피하기 위해 글로벌 콘솔 시장 공략에 사활을 걸었다. 현재 개발 중인 ‘프로젝트 G(실시간 전략 게임)’와 ‘LLL(3인칭 슈터)’은 엔씨가 리니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얼마나 독창적인 IP를 창조할 수 있는지를 판가름할 시험대다. 특히 글로벌 게이머들은 ‘페이투윈’ 모델에 극도의 반감을 가지고 있다. 엔씨가 과연 콘솔 시장의 문법에 맞는 ‘웰메이드 패키지 게임’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가 ‘NC’ 브랜드의 글로벌 안착을 결정할 것이다.

이러한 혁신을 위해서는 창의성을 존중하는 개발 문화의 복원이 시급하다. 김택진 대표가 사내 메일에서 강조한 ‘미래의 창작자’라는 표현은 개발자 중심의 수평적 문화를 회복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과거 엔씨소프트는 한국 최고의 개발 인재들이 모이는 ‘꿈의 직장’이었으나 최근에는 경직된 조직 문화와 상업적 성공에 대한 압박으로 창의성이 질식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박병무 공동대표 체제 출범 이후 단행한 개발 스튜디오 분사와 책임 프로듀서 제도 강화는 개발자들에게 더 많은 자율성을 부여하고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를 정착시키려는 시도다.

◆ 시장의 기대와 우려의 교차...‘리니지’ 없는 엔씨, 생존 가능할까
 
엔씨소프트 판교 R&D센터

시장에서는 엔씨의 과감한 변신에 기대와 우려가 교차한다. 브랜드 리뉴얼을 통해 ‘리니지 회사’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기업 가치를 재평가(Re-rating)받으려는 노력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체질 개선은 브랜드 명칭이 아니라 ‘히트 신작’의 출현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투자자들은 엔씨가 AI 기술에 막대한 투자를 쏟아붓고 있지만 이것이 언제 실질적인 매출로 이어질지에 대한 명확한 청사진 제시를 요구하고 있다. 글로벌 게임 시장은 이미 마이크로소프트, 소니, 텐센트 등 거대 자본이 지배하는 각축장이다. 엔씨가 이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AI 기술력을 넘어 ‘글로벌 유통망’과 ‘플랫폼 생태계’를 동시에 구축해야 하는 난제를 안고 있다.

엔씨의 이번 사명 변경은 어쩌면 30년 역사의 ‘자기부정’이자 가장 큰 ‘도박’이다. ‘리니지’라는 절대적인 현금 창출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도전이다. 그러나 그 ‘리니지’가 이제는 엔씨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어버렸다.

앞으로 엔씨는 기술 기업으로서의 정체성과 콘텐츠 기업으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 AI가 아무리 뛰어나도 결국 이용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재미’라는 게임의 본질이다. 엔씨가 ‘Next’라는 미래를 향한 기술적 도약과 ‘Creative’라는 콘텐츠의 창의성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융합하느냐에 따라 이번 도박의 성패가 갈릴 것이다.

2020년부터 시작된 긴 브랜드 리뉴얼의 마침표를 찍은 엔씨는 이제 막 새로운 항해를 시작했다. 과연 이 배가 ‘리니지’라는 익숙한 항구를 떠나 ‘글로벌 콘텐츠 플랫폼’이라는 미지의 대양에 성공적으로 도착할 수 있을지 전 세계 게이머와 투자자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엔씨의 다음 행보를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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