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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월가가 여는 '토큰화 증시', 한국도 금융의 전략 세워야

2026-03-14 11:08:17
월가가 여는 ‘토큰화 증시’, 한국도 금융의 전략 세워야 [사진=노트북LM]

[경제일보] 주식 시장의 근간을 바꿀 수 있는 새로운 실험이 월가에서 시작되고 있다. 전통적인 증권 거래 시스템을 블록체인 기반으로 전환하는 ‘주식의 토큰화(Tokenized Stocks)’다. 이는 단순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 금융 인프라 자체를 재편할 수 있는 변화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계 최대 증권시장인 뉴욕증권거래소(NYSE)와 나스닥은 주식을 디지털 토큰 형태로 발행하고 거래하는 시스템 구축을 추진하고 있으며 현재 미국 규제당국인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승인 절차를 밟고 있다. 이 구상이 현실화될 경우 주식 시장의 거래 방식과 구조는 지금과 크게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하면 주식 거래는 하루 24시간 가능해지고 고가 주식도 소수점 단위로 나누어 투자할 수 있다. 또한 거래 다음 날 결제가 이뤄지는 기존 ‘T+1’ 방식 대신 실시간에 가까운 결제가 가능해질 수 있다. 주식이 더 이상 중앙 서버에 기록되는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블록체인 위에서 거래되는 디지털 자산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월가가 이러한 변화를 추진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금융 산업이 거대한 기술 전환의 시기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비트코인을 통해 등장한 블록체인 기술은 단순한 가상자산을 넘어 금융 인프라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보여주고 있다. 전통 금융과 디지털 자산의 경계가 빠르게 허물어지는 가운데 월가의 금융회사들은 주식과 채권, 펀드 등 기존 금융 자산을 블록체인 위에서 거래하려는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주식 토큰화가 가져올 변화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거래 시간의 제약이 크게 줄어든다. 블록체인 기반 시장에서는 투자자가 세계 어디에서든 24시간 거래에 참여할 수 있다. 투자 접근성 역시 확대된다. 수백 달러에 이르는 고가 주식도 소수점 단위로 나누어 투자할 수 있어 개인 투자자의 참여 문턱이 낮아질 수 있다. 여기에 거래 효율성도 높아진다. 블록체인은 거래 기록을 즉시 확인할 수 있고 결제 시간을 단축할 수 있어 금융 시스템의 비용을 줄이는 효과가 기대된다.

물론 해결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규제와 시장 안정성이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는 토큰화된 주식이 기존 주식과 동일한 법적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배당금 수령과 의결권 행사, 법적 소유권 등이 기존 주식과 동일하게 인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블록체인 기반 시장에서 내부자 거래나 시장 조작을 어떻게 감시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월가가 이 실험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블록체인이 향후 금융 시장의 구조를 다시 설계할 수 있는 기술로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전화와 인터넷이 금융 거래 방식을 바꾸었듯이 블록체인 역시 금융 산업의 다음 단계를 여는 핵심 기술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 금융시장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정보기술 인프라와 디지털 역량을 갖추고 있지만 자본시장 경쟁력에서는 여전히 글로벌 금융 중심지들과 격차가 존재한다. 만약 주식의 토큰화가 글로벌 금융의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 잡는다면 한국 금융 역시 이에 대한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우선 제도적 준비가 필요하다. 한국 정부는 2027년부터 토큰증권(STO) 제도를 도입할 계획이다. 이는 주식과 채권뿐 아니라 부동산, 미술품, 지식재산권 등 다양한 자산을 디지털 토큰 형태로 거래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그러나 단순한 제도 도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금융당국과 거래소, 금융회사들이 함께 참여하는 실험적 시장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한국거래소는 블록체인 기반의 차세대 증권 거래 시스템 연구를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글로벌 자본시장의 흐름이 디지털 자산으로 이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존 시스템만으로는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금융당국 역시 규제를 단순한 통제 수단이 아니라 혁신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설계해야 한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규제를 앞세우기보다 시험과 검증의 공간을 제공하는 규제 샌드박스 확대가 요구된다.

한국 금융 산업도 문화 산업처럼 글로벌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 K-팝과 K-콘텐츠가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기술과 창의성 그리고 시장 전략이 결합됐기 때문이다. 금융 역시 마찬가지다. 디지털 금융 기술과 자본시장 제도, 글로벌 투자 네트워크가 결합될 때 비로소 ‘K-금융’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한국 금융의 미래는 단순히 국내 시장의 안정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글로벌 금융 질서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야 한다. 월가가 준비하고 있는 주식의 토큰화는 단순한 기술 실험이 아니라 금융 패러다임 변화의 신호일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전략이다. 기술 변화의 흐름을 읽고 제도와 시장을 준비하는 나라만이 다음 금융 시대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 한국 금융이 세계 속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K-팝과 K-콘텐츠에 이어 ‘K-금융’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준비가 시작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