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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쿠팡·하이브 안정 보장 요구, 내정간섭 아닌가

한석진 기자 2026-04-23 07:54:18
자본시장법상 사기적 부정거래 혐의를 받는 방시혁 하이브 의장이 지난 서울 마포구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고 있다. [사진=유대길 기자]


[경제일보] 국가와 국가 사이에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가까운 동맹이라 해서 그 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안보를 함께 지키고 경제를 함께 키우는 관계라 해도 상대국의 사법 절차와 공적 시스템 안으로 들어와 결과를 요구하는 순간 관계의 성격은 달라진다. 우호는 특권이 아니고 동맹은 면책 조항이 아니다.
 

최근 불거진 쿠팡과 하이브 논란은 그 기본선을 다시 묻게 한다. 미국 측이 쿠팡 창업자 김범석 의장의 법적 안전 보장 문제를 거론했고 한국 정부는 안보 협의는 이 사안과 분리돼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이어 하이브 방시혁 의장의 미국 방문과 관련해 주한 미국대사관이 출국 협조를 요청한 사실도 알려졌다. 사안별 세부 경위는 더 확인될 수 있다. 그러나 큰 줄기는 이미 선명하다. 한국 안에서 진행되는 문제에 미국이 직접 이해를 표시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불편함을 느끼는 국민이 적지 않다. 당연한 반응이다. 이는 감정적 민족주의가 아니다. 반미 정서와도 다르다. 주권국가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상식적 문제의식이다.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사건은 대한민국 법률에 따라 처리돼야 한다. 한국의 수사기관은 한국 법에 따라 움직여야 하고 한국 법원은 한국 헌정 질서 안에서 판단해야 한다. 국가의 기본은 여기서 출발한다.
 

물론 미국에도 논리는 있다. 쿠팡은 미국 증시에 상장된 기업이고 다수의 해외 투자자가 연결돼 있다. 하이브 역시 세계 시장에서 영향력을 넓힌 기업이다. 자국 시장과 연계된 기업의 불확실성에 우려를 표하고 외교 채널을 통해 관심을 전달하는 일 자체를 모두 비정상이라 할 수는 없다. 어느 나라 정부든 자국 기업이 해외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판단하면 움직인다.
 

그러나 문제는 어디까지가 보호이고 어디서부터가 개입이냐는 데 있다. 우려 전달과 결과 요구는 다르다. 기업의 애로를 설명하는 것과 사법 절차에 영향을 미치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다. 더구나 안보 협의나 통상 현안과 연결된 메시지로 비칠 경우 상대국 국민은 이를 단순한 의견 개진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힘 있는 나라가 힘의 무게를 실어 요구한다고 느끼게 된다.
 

이번 사안이 더 민감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상이 인도주의 문제나 긴급한 공공 현안이 아니라 특정 기업과 특정 경영진의 이해관계에 가깝기 때문이다. 동맹의 이름으로 안보 의제를 논하는 자리에서 개별 기업 사안이 거론된다면 동맹의 품격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군사 협력은 공동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지 민간 기업의 방패가 되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외교 채널 역시 양국 국민 전체의 이익을 다루는 자리이지 개별 기업 민원을 해결하는 창구가 아니다.
 

한국 정부가 안보 협의와 기업 사안을 분리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것은 옳은 대응이다. 국가는 상대가 누구든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미국이라서 예외가 되고 다른 나라라서 강경해진다면 그것은 외교가 아니라 눈치 보기다. 원칙은 상대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 때 비로소 힘을 얻는다.

 

한국 사회 역시 함께 돌아볼 대목이 있다. 외국 정부가 한마디 하면 국내 제도가 곧바로 흔들리는 듯 받아들이는 태도다. 우리 스스로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단단하다면 과도하게 흔들릴 이유가 없다. 수사는 증거로 말하면 된다. 행정은 법률로 설명하면 된다. 법원은 판결문으로 답하면 된다. 외부의 시선이 거셀수록 내부 시스템은 더 차분하고 단단하게 작동해야 한다.
 

기업도 새겨야 할 점이 있다. 세계 시장에서 성장한 기업일수록 더 높은 책임을 져야 한다. 규모가 커졌다고 법의 예외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국가 간 관계를 등에 업고 규제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는 기대는 오래가지 못한다. 시장이 높이 평가하는 것은 특혜가 아니라 예측 가능성과 공정한 경쟁 질서다.
 

한미동맹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자산이다. 안보와 경제, 기술 협력의 토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 동맹의 무게를 기업 현안 해결에 끌어다 쓰는 순간 정작 필요한 안보 신뢰는 닳기 시작한다. 국민이 동맹을 지지하는 이유는 특정 기업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다. 공동의 가치와 상호 존중을 지키기 위해서다.
 

국가 관계가 깊어질수록 지켜야 할 예의도 깊어진다. 상대국 제도를 존중하는 일은 외교의 출발점이다. 동맹은 서로의 법 위에 서는 관계가 아니다. 서로의 법을 존중하는 관계다.
 

쿠팡이든 하이브든 기업은 시장에서 경쟁하면 된다. 다툴 일이 있다면 절차에 따라 판단받으면 된다. 정부는 정부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 기업의 대리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 정부 역시 감정적 대응도 저자세도 버리고 기준대로 대응하면 된다.
 

국민이 보고 싶은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강대국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장면도 아니고 눈치를 보는 장면도 아니다. 누구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법과 원칙대로 처리하는 국가의 모습이다. 그것이 주권이고 그것이 국가의 품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