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K-뷰티가 TSMC를 닮았다고?…닛케이가 주목한 '분업의 힘'

송정훈 기자 2026-08-09 08:01:22
프랑스 이어 세계 화장품 수출 2위…브랜드는 기획, ODM은 제조 '공장 없는 화장품 회사'도 글로벌 진출…아마존·틱톡이 성장 가속 "품질보다 생태계가 경쟁력"…반도체식 분업 구조가 K-뷰티 키웠다
[사진=AI 생성 이미지]

[경제일보] "K-뷰티는 대만의 TSMC를 닮았다."

일본 경제지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이 최근 한국 화장품 산업을 두고 내놓은 평가다. 처음 들으면 화장품과 반도체가 무슨 관계냐는 의문이 든다. 하지만 산업 구조를 들여다보면 두 산업은 의외로 닮은 점이 많다.

한국 화장품 산업은 지난해 수출액 114억 달러를 넘어서며 프랑스에 이어 세계 2위 화장품 수출국으로 올라섰다. K-팝과 K-드라마에 이어 K-뷰티가 한국의 대표 수출 산업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평가다.

◆브랜드는 팔고, ODM은 만든다

닛케이가 주목한 것은 화장품 자체보다 산업 생태계다.

과거 화장품 기업은 제품 기획부터 연구개발(R&D), 생산, 마케팅, 유통까지 대부분 직접 담당했다. 일본의 시세이도와 가오 같은 전통 화장품 기업들이 대표적이다.

반면 한국은 역할을 과감하게 나눴다.

브랜드 기업은 제품 기획과 마케팅, 판매에 집중하고, 한국콜마·코스맥스 같은 전문 ODM(제조자개발생산) 기업은 연구개발과 원료 조달, 생산, 품질관리를 맡는다.

이는 반도체 산업에서 설계를 담당하는 팹리스와 제조를 담당하는 파운드리의 관계와 비슷하다. TSMC가 세계 최대 파운드리 기업으로 성장하며 반도체 생태계를 바꿨듯, 한국의 ODM 기업들도 K-뷰티 생태계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공장 없는 화장품 회사'가 늘어난 이유

이 같은 분업 구조 덕분에 화장품 창업 방식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브랜드를 만들려면 생산시설부터 갖춰야 했다. 하지만 제도 개선 이후 제조시설 없이도 책임판매업자로 등록할 수 있게 되면서 브랜드 창업 문턱이 크게 낮아졌다.

덕분에 소규모 스타트업도 공장을 직접 짓지 않고 ODM 기업과 협업해 제품을 출시할 수 있게 됐다.

사업 방식도 바뀌었다.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제품을 먼저 출시한 뒤 시장 반응을 확인하고, 잘 팔리는 제품에 집중 투자하는 방식이다. 초기 투자 부담은 줄이고 성공 가능성이 확인된 제품에는 빠르게 자원을 투입할 수 있는 구조다.

ODM 기업도 여러 브랜드의 주문을 동시에 생산하면서 원료를 대량 구매하고 생산 효율을 높일 수 있다. 브랜드는 브랜드대로, 제조사는 제조대로 경쟁력을 키우는 '윈윈 구조'가 형성된 셈이다.

◆아마존이 만든 K-뷰티의 새 공식

글로벌 온라인 플랫폼도 K-뷰티 성장의 또 다른 축이다.

대표 사례가 에이피알(APR)의 메디큐브다. 메디큐브는 미국 아마존을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하며 북미 시장에서 대표 K-뷰티 브랜드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코스알엑스(COSRX) 역시 아마존 스킨케어 분야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며 글로벌 인지도를 키웠다.

여기에 틱톡, 세포라, 울타뷰티 등 글로벌 플랫폼이 더해지면서 K-뷰티는 해외 소비자 반응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곧바로 신제품을 내놓는 구조를 갖추게 됐다.

예전에는 해외 진출을 위해 현지 유통망을 확보하는 데 수년이 걸렸다면, 이제는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세계 시장에서 곧바로 소비자 반응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품질보다 생태계가 경쟁력

물론 K-뷰티를 TSMC와 동일시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TSMC의 경쟁력은 초미세 반도체 공정과 막대한 설비투자, 제조 기술에 있다. 반면 K-뷰티의 강점은 빠른 제품 개발과 트렌드 대응, ODM 생태계, 디지털 마케팅이 결합된 산업 구조다.

닛케이가 말한 'TSMC형'이라는 표현도 제품이 아니라 산업의 분업 구조를 의미한다.

전문가들은 K-뷰티의 성공을 단순히 화장품 품질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브랜드는 기획과 마케팅에 집중하고, ODM은 연구개발과 제조에 집중한다. 여기에 글로벌 플랫폼이 소비자 반응을 빠르게 전달하면서 '아이디어→제품 개발→출시→시장 검증→성공 제품 확대'라는 선순환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한 화장품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좋은 공장을 가진 회사가 경쟁력이었다면 지금은 좋은 아이디어를 가장 빠르게 제품으로 만들 수 있는 생태계가 경쟁력"이라며 "K-뷰티의 진짜 강점은 특정 기업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브랜드와 ODM 기업, 글로벌 플랫폼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산업 구조에 있다"고 말했다.

결국 K-뷰티의 경쟁력은 '잘 만드는 기술'만이 아니다. 시장의 변화를 가장 빠르게 읽고, 가장 빠르게 제품으로 구현해 세계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생태계 자체가 한국 화장품 산업의 가장 큰 무기가 되고 있다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