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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AI 시대 전력은 산업의 쌀이다…원전 확대 더 미룰 시간 없다

경제일보 2026-08-28 17:16:40
[사진=연합뉴스]

[경제일보] 반도체와 인공지능(AI)이 대한민국 경제의 미래를 이끌 핵심 성장동력으로 떠오르면서 전력 확보가 국가 경쟁력의 최우선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와 첨단 반도체 공장은 막대한 전력을 24시간 안정적으로 공급받아야 가동할 수 있다.

국가 차원의 대형 산업 프로젝트까지 본격화하면 2040년 최대 전력 수요가 대형 원전 19기 분량만큼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제 전력은 산업을 뒷받침하는 단순한 보조 인프라가 아니다. 반도체·AI 시대의 승패를 가르는 핵심 생산요소다.

그런데 우리의 에너지 정책은 아직도 과거의 이념적 대립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전이냐 재생에너지냐를 놓고 양자택일식 논쟁을 반복하는 사이 세계는 이미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미국과 유럽, 중국 등 주요국은 AI와 첨단 제조업 경쟁에 대응해 원전과 재생에너지를 함께 확대하고 송전망과 에너지저장장치(ESS) 등 전력 인프라를 국가 전략 차원에서 재편하고 있다.

가장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은 전력 수요의 현실이다. AI는 막대한 전력을 필요로 하는 산업이다. 대규모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는 일반적인 제조업 시설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 반도체 공장 역시 순간적인 전력 품질 저하나 정전이 생산 차질과 막대한 피해로 이어질 수 있는 대표적인 전력 다소비 산업이다. 전력은 값싸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해야 한다.

재생에너지가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태양광과 풍력은 탄소중립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며 앞으로도 확대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재생에너지만으로 모든 전력 수요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햇빛과 바람은 인간의 계획표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날씨와 계절에 따라 발전량이 달라지는 재생에너지는 대규모 저장 기술과 보완 전원, 안정적인 전력계통이 함께 갖춰져야 한다. 국토가 좁고 전력 소비가 수도권과 산업단지에 집중된 한국의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결국 필요한 것은 에너지원 간 소모적인 대결이 아니라 현실적인 조합이다. 재생에너지는 적극 확대하되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담당할 원전을 확보하고 가스발전과 ESS 등 보완 전원을 적절히 조합해야 한다. 탄소중립과 산업 경쟁력, 에너지 안보라는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려면 원전은 중요한 전략 자산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더 시급한 것은 시간이다. 원전 한 기를 짓는 데는 부지 선정과 인허가, 주민 수용성 확보, 건설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송전망 확충 역시 마찬가지다. 오늘 전력 부족이 예상된다고 해서 내일 발전소를 세울 수는 없다. 2040년의 전력 수요를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203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선택지가 크게 줄어들 수 있다.

발전소를 지어 놓고도 전기를 보내지 못하는 일도 반복돼서는 안 된다. 신규 원전과 재생에너지 확대만큼 중요한 것이 송전망이다. 전력 생산지와 소비지를 연결하는 초고압 송전망과 지역별 분산형 전력망, 대규모 ESS와 스마트그리드 구축을 함께 추진해야 한다. 전력망은 도로·항만·철도 못지않은 국가 기간 인프라다. 주민 반대와 인허가 지연으로 사업이 수년씩 표류한다면 세계 반도체·AI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정책의 일관성도 절대적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탈원전과 원전 확대를 반복하는 에너지 정책으로는 어느 기업도 장기 투자를 결정하기 어렵다. 발전소 하나를 짓는 데 수십 년을 내다봐야 하는 산업에서 5년짜리 정치 논리가 50년짜리 에너지 전략을 흔들어서는 안 된다. 여야와 정부, 산업계가 정권의 이해를 떠나 초당적인 국가 에너지 전략에 합의해야 하는 이유다.

전력 부족은 성장의 속도를 늦추는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투자할 공장과 데이터센터가 있어도 전력이 부족하면 기업은 해외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반대로 안정적이고 경쟁력 있는 전력을 공급할 수 있다면 글로벌 기업과 첨단산업을 끌어들일 수 있다. 앞으로 기업의 투자 입지 결정에서 안정적인 전력 공급 여부는 세금과 규제 못지않은 핵심 조건이 될 것이다.

전기는 AI 시대의 ‘산업의 쌀’이다. 쌀이 부족한 나라가 산업화를 꿈꾸기 어렵듯 안정적인 전력 없이 반도체와 AI 강국을 논하는 것은 공허하다. 이제 원전과 재생에너지의 진영 논쟁을 끝내야 한다. 안전성을 전제로 원전을 확대하고 재생에너지와 ESS를 적극 활용하면서 송전망과 전력계통을 획기적으로 확충해야 한다.

2040년의 전력 위기는 2040년에 해결할 수 없다. 발전소와 송전망은 위기가 닥친 뒤 만드는 시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결정을 미루면 미래에는 선택할 수 있는 길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 정부와 정치권은 원전 한 기를 둘러싼 소모적 논쟁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산업 지도를 지탱할 장기 전력 수급 계획부터 다시 세워야 한다.

AI와 반도체 강국을 원한다면 그에 걸맞은 전력을 준비해야 한다. 산업 경쟁력은 구호가 아니라 전력에서 시작된다. 원전 확대와 재생에너지의 현실적 조화, 이를 뒷받침할 전력망 혁신이야말로 대한민국이 미래 산업 패권 경쟁에서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국가 인프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