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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칼럼] 에너지 생존 게임, 이제 '원전'이라는 정공법으로 응답하라

양규현 사장 2026-04-07 10:16:21
양규현 경제일보 사장
[경제일보] 중동발 전쟁의 포화가 다시금 세계 에너지 질서를 뒤흔들고 있다. 유가와 가스 가격이 요동칠 때마다 반복되는 “이번엔 무엇이 다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늘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차량 요일제, 실내 온도 제한, 절전 캠페인. 고통 분담이라는 이름 아래 소비를 줄이자는 구호는 요란했지만, 정작 에너지 공급 구조를 바꾸는 근본적인 대책은 번번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에너지 정책이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략’이 되지 못하고 현상을 유지하는 ‘관리’에 머물렀던 결과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마주한 세계는 과거와 완전히 다르다. 지정학적 리스크는 이제 변수가 아닌 상수가 되었고, 에너지는 더 이상 값싸고 안정적인 공공재가 아니다. 여기에 인공지능(AI) 혁명이 가세하며 전력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폭증하고 있다. 데이터센터 하나가 중소도시 전체의 전력을 소비하고, 반도체와 전기차, 수소 산업 등 미래를 책임질 모든 전략 산업이 전력을 먹고 자란다. 이제 에너지는 경제의 문제를 넘어 국가의 생존과 직결된 안보의 핵심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여전히 ‘덜 쓰기’라는 소극적 태도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정책이 아니라 방치이자 직무유기다.

지난 수년간 우리 에너지 정책의 중심은 재생에너지 확대에 쏠려 있었다. 탄소중립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태양광과 풍력은 분명 가야 할 길이다. 하지만 문제는 ‘속도’와 ‘균형’이었다. 자연환경에 의존하는 재생에너지의 간헐성과 저장 기술의 한계를 간과한 채, 기저 전원을 성급하게 줄이려 했던 시도는 전력 수급의 불안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결국 우리는 다시 원자력발전소의 가동을 늘리는 선택지로 돌아왔다. 이념과 구호가 현실의 냉혹한 데이터 앞에 무릎을 꿇은 셈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냉철한 ‘계산기’다. 감정이 아닌 ‘데이터’에 기반해 자문해 보자. 탄소 배출이 적으면서도 대량의 전력을 24시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수단이 무엇인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설계·건설·운영 역량을 갖추고 있으며, 비용 경쟁력까지 확보된 에너지원이 우리에게 있는가. 답은 자명하다. 바로 원자력이다.

원전은 결코 과거의 산업이 아니다. 소형모듈원전(SMR)과 같은 차세대 기술은 안전성과 효율성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며 에너지 산업의 지형을 바꾸고 있다. 자원 빈국인 대한민국에서 원전만큼 ‘국산 에너지’에 가까운 효율을 내는 자원은 드물다. 외부 충격에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에너지원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에너지 주권이다.

물론 안전성에 대한 우려와 폐기물 처리, 사회적 합의라는 난제가 남아 있다. 그러나 위험을 이유로 선택을 미루는 것은 미래 세대에게 전력 부족과 산업 쇠퇴라는 더 큰 위험을 떠넘기는 무책임한 처사다. 기술은 회피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와 극복의 대상이다. 투명한 정보 공개와 과학적 근거, 그리고 엄격한 규제를 통해 국민적 신뢰를 쌓아가는 정공법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천하의 큰일은 반드시 작은 일에서 시작된다(天下大事 必作於細)”는 말이 있다. 에너지 정책도 마찬가지다. 당장의 여론이나 정치적 일정에 흔들리는 임시방편으로는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세울 수 없다. 장기적인 수급 계획과 일관된 투자, 그리고 현장을 지키는 전문 인력 양성이라는 기본부터 다시 세워야 한다. 그 튼튼한 토대 위에서 원전을 중심으로 삼고, 재생에너지와 신기술이 조화를 이루는 믹스(Mix) 구조를 완성해야 한다.

세계 주요 선진국들도 이미 방향을 틀었다. 에너지 위기를 겪으며 원전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탄소중립과 에너지 안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원전 생태계 복원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 거대한 흐름을 외면한 채 우리만 다른 길을 고집한다면, 그 대가는 산업 경쟁력 약화와 국부 유출이라는 고통으로 돌아올 뿐이다.

이제는 결단해야 한다. 첫째, 기존 원전의 계속 운전을 통해 당장의 전력 공백을 막아야 한다. 둘째, 차세대 원전(SMR) 기술에 대한 투자를 과감히 늘려 글로벌 시장의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 셋째, 에너지 정책을 정치적 프레임에서 해방시켜 과학과 경제의 영역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에너지는 국가 경제의 혈액이다. 혈맥이 막히면 심장이 멈춘다. 중동의 포성은 우리에게 더 이상 임시방편으로는 버틸 수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 우리가 가진 기술력과 역량을 냉정하게 신뢰하고, 가장 현실적이며 강력한 대안인 원전을 정책의 중심에 세워야 한다. 그것만이 대한민국이 글로벌 에너지 전쟁에서 살아남고, 미래 산업의 패권을 거머쥘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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