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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경제일보] 선박부터 수주하고 조선소 만든 HD현대…54년 '선행투자 DNA'

김태휘 기자 2026-09-08 09:09:31

1971년 그리스서 원유 운반선 2척 따낸뒤 이듬해 조선소 건립 시작

금융위기 후 해양플랜트 3조 손실…선행투자, 속도서 관리형 전환

AI·로봇 활용 지능형 자율 조선소 목표…전력기기 새 성장축 추가

[자료=HD현대]

[경제일보] HD현대의 출발은 일반적인 순서와 거리가 멀었다. 공장을 지은 뒤 제품을 만드는 것이 상식이지만 현대중공업은 조선소가 제대로 갖춰지기도 전에 배부터 수주했다. 1971년 10월 그리스 선주 리바노스로부터 26만톤급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2척을 따냈고, 이듬해 3월 울산 미포만에서 조선소 건설에 들어갔다. 조선소 공사와 선박 건조가 동시에 진행됐다. 1974년 2월 첫 선박을 진수했고 같은 해 6월 조선소 1단계 준공과 VLCC 2척 명명식을 열었다.
 
시장과 공장이 갖춰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수주부터 한 뒤 생산기반을 동시에 만드는 방식이었다. 1983년 현대중공업은 선박 수주와 건조량에서 세계 1위에 올라섰다.
 
이 경험은 이후 HD현대 경영에서 반복됐다. 필요하다고 판단한 생산능력과 기술을 시장이 충분히 커지기 전에 확보하고, 부족한 사업은 직접 만들거나 인수했다. 성공할 경우 시장 선점 효과가 컸지만 판단이 빗나가면 대규모 손실도 감수해야 했다.
 
HD현대의 54년은 이른바 ‘선행투자 DNA’의 성공과 실패가 교차한 역사다.
 
배 만들다 엔진·전력·건설기계까지…필요한 것은 직접 확보
 
HD현대의 사업 확장은 조선소 안에서 시작됐다.
 
배를 안정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선박의 심장인 엔진이 필요했다. 현대중공업은 1976년 엔진사업부를 발족했고, 1978년 대형엔진공장을 완공했다. 1977년에는 중전기사업부를 세워 변압기와 전력기기 분야에도 뛰어들었다.
 
건설장비와 로봇도 같은 흐름이었다. 1982년 건설장비사업으로 영역을 넓혔다. 로봇 분야에서는 1984년 용접기술연구소에 로봇 전담팀을 만들고, 1985년 산업용 로봇사업에 진출했다. 1987년 국내 최대 규모 로봇공장을 준공해 생산을 시작했고, 1988년에는 현대로보트산업을 별도 법인으로 출범시켰다.
 
조선에 필요한 기술을 밖에서 구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확보한 것이다. 축적된 기술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소 밖 시장으로 뻗었다.
 
2000년에는 약 10년에 걸친 연구 끝에 자체 중형 디젤엔진인 ‘힘센엔진’을 개발했다. 선박용에서 시작한 중전기 사업은 현재 HD현대일렉트릭으로 성장해 글로벌 전력망과 AI 데이터센터에 변압기와 전력기기를 공급한다.
 
사업 확장은 인수합병으로도 이어졌다. 현대중공업은 2010년 아부다비 국영석유투자회사(IPIC)가 갖고 있던 현대오일뱅크 지분 70%를 넘겨받아 지분율을 91.13%까지 높였다. 11년 만의 경영권 재확보였다.
 
2021년에는 당시 현대중공업그룹이 두산인프라코어를 인수했다. 조선과 에너지에 건설기계를 더하면서 그룹의 포트폴리오를 다시 넓혔다.
 
방식은 달라도 공통점은 분명했다. 기존 주력사업이 성숙한 뒤 새로운 산업을 찾은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 쌓은 대형 제조·설비 운영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영역을 미리 확보했다.
 
[사진=ChatGPT]
 
해양플랜트 3조 적자 쇼크…선행투자의 수업료
 
먼저 뛰어드는 경영이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실패가 2010년대 해양플랜트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상선시장이 침체하자 국내 조선사들은 해양플랜트를 새로운 고부가가치 시장으로 봤다. 현대중공업 역시 대형 해양 프로젝트 수주를 확대했다.
 
하지만 선박과 해양플랜트는 사업구조가 달랐다. 해양플랜트는 발주처 요구에 따른 설계 변경이 잦았고 제작·설치 과정도 복잡했다. 경험이 부족한 상황에서 저가 수주와 공정 지연이 겹쳤다. 여기에 국제유가 급락까지 이어졌다.
 
현대중공업은 2014년 연결 기준 3조2495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창립 이후 최대 규모였다. 이 손실 전체가 해양플랜트에서 발생한 것은 아니다. 세계 조선경기 부진과 조선·플랜트 등 여러 사업의 원가 상승이 함께 영향을 미쳤지만 해양플랜트의 대규모 부실이 실적 악화의 핵심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2015년에도 해양플랜트 부문에서 약 1조3000억원 규모의 손실이 반영됐다. 현대중공업은 2014~2015년 2년 연속 대규모 적자를 기록한 뒤 2016년 전사 기준 흑자로 돌아섰다.
 
해양플랜트 실패는 HD현대에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시장에 먼저 들어가는 것만으로는 경쟁력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술과 설계 역량, 계약조건, 원가와 공정 위험을 함께 통제하지 못하면 선행투자가 오히려 대규모 부실로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후 HD현대의 선행투자는 과거의 ‘속도 우선’에서 수익성과 현금흐름, 데이터에 기반한 ‘관리형 선행투자’로 성격이 달라졌다.
 
사람보다 AI가 먼저 판단하는 조선소…54년 DNA의 2막
 
HD현대는 현재 다시 미래 시장보다 앞서 설비와 기술을 준비하고 있다. 이번 대상은 선박이 아니라 조선소 자체다.
 
HD한국조선해양과 조선 계열사들은 2021년부터 ‘FOS(Future of Shipyard)’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빅데이터와 디지털트윈, 로봇, AI를 이용해 노동집약적인 조선소를 지능형 생산시설로 바꾸는 작업이다.
 
2023년에는 디지털트윈을 기반으로 작업과 장비 상황을 실시간 확인할 수 있는 1단계 ‘눈에 보이는 조선소’를 구축했다. 2026년까지 생산 데이터를 연결해 공정을 예측·최적화하는 2단계를 거쳐 2030년에는 사람의 개입을 최소화한 ‘지능형 자율 운영 조선소’를 완성한다는 목표다.
 
회사가 제시한 목표는 생산성 30% 향상과 건조기간 30% 단축이다. 이는 실제 달성 실적이 아닌 2030년 목표치다.
 
로봇도 조선소에 투입한다. HD한국조선해양과 HD현대로보틱스는 미국 페르소나AI 등과 조선 용접용 휴머노이드를 개발하고 있다. 2026년까지 시제품 개발을 끝내고 2027년부터 현장 실증과 상용화를 진행하는 계획이다.
 
조선업의 고질적인 숙련인력 부족과 안전 문제를 AI와 로봇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다. 과거에는 새로운 도크를 만들어 생산량을 늘렸다면 앞으로는 같은 조선소에 AI와 로봇을 넣어 생산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선행투자가 바뀌고 있다.
 
조선 밖에서는 전력기기가 새로운 성장축으로 떠올랐다. HD현대일렉트릭은 미국과 국내에서 변압기 생산능력을 확대해 왔다. AI 데이터센터와 재생에너지 증가, 미국의 노후 전력망 교체가 맞물리면서 세계적으로 변압기 공급부족이 심해진 데 따른 것이다.
 
로이터에 따르면 HD현대일렉트릭의 올해 6월 말 수주잔고는 85억 달러로 6개월 전보다 23% 증가했다. 3년 이상의 물량을 확보했고 일부 고객과는 2030년 인도 물량까지 협의하고 있다.
과거 중전기사업부로 시작한 사업이 반세기 뒤 AI 인프라의 핵심 공급망으로 성장한 셈이다.
 
HD현대는 지난해 세계 조선업계 최초로 누적 선박 5000척 인도 기록도 세웠다. 1974년 첫 VLCC를 시작으로 68개국 700여 선주사에 선박을 공급한 결과다.
 
54년 전 미포만에서는 배를 지을 조선소조차 없는 상태에서 먼저 선박을 수주했다. 지금은 AI가 스스로 공정을 판단하는 조선소와 아직 수요가 더 커질 전력 인프라에 미리 투자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투자 방식이다. 1970년대 선행투자가 창업자의 결단과 실행력에 의존했다면 현재는 수주잔고와 데이터, 자동화 기술, 글로벌 수요 전망을 바탕으로 움직인다.
 
HD현대의 DNA는 무조건 남보다 빨리 뛰어드는 데 있지 않다. 앞으로 필요할 기술과 생산능력을 먼저 정하고, 시장이 본격적으로 커지기 전에 이를 실제 산업으로 만드는 능력에 가깝다.
 
조선소와 배를 동시에 만들었던 승부수는 HD현대를 세계 최대 조선사로 키웠다. 해양플랜트는 같은 DNA가 얼마나 큰 위험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도 보여줬다.
 
업계 관계자는 “2030년 AI 자율조선소와 전력기기가 또 하나의 ‘미포만 신화’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면서 “다만 분명한 것은 HD현대가 54년 전과 마찬가지로 시장이 완성되기를 기다리기보다 먼저 생산기반을 만들고 있다는 점”이라고 했다. 이어 “선행투자는 여전히 HD현대의 가장 강력한 성장 DNA이자 가장 엄격하게 관리해야 할 위험”이라고 강조했다.


[아주경제 2026년 09월 08일자 13면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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