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일보] 1987년 체제 이후 39년. 대한민국은 대통령 탄핵을 두 차례 겪었고 IMF 외환위기를 지나 극단적 진영 대립과 국정 마비를 반복해왔다. 대통령 권한 집중 문제는 오래전부터 개헌 논의의 출발점이었다. 여야 정치권은 선거 때마다 개헌 필요성을 외쳤고 원로 정치인들도 “87년 체제의 한계”를 이야기해왔다.
그런데 정작 국회가 보여준 장면은 허탈했다. 개헌안 내용 이전에 국회가 스스로 헌법이 예정한 절차를 비워버렸다. 반대는 있었지만 표결은 없었다. 찬성과 반대가 아니라 빈자리만 남았다.
7일 국회 본회의에서 개헌안 표결은 의결정족수 미달로 성립조차 하지 못했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집단 불참하면서 재적 의원 3분의 2라는 헌법상 요건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회는 개헌안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도 전에 스스로 심판 기능을 멈춰 세웠다.
국민의힘은 이번 개헌안을 두고 “졸속 개헌”이라고 주장한다. 민주당이 공소취소 특검법 등을 강행 처리하며 사법 체계를 흔드는 상황에서 개헌까지 밀어붙이고 있다는 비판도 내놓았다. 정치적 반대는 가능하다. 헌법 개정은 국가 기본질서를 바꾸는 문제인 만큼 더 엄격한 검증도 필요하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국회의원은 본회의장으로 들어와야 한다. 의회민주주의에서 반대는 표결로 하는 것이다. 반대표를 던지고 기록으로 남기고 국민 앞에서 정치적 책임을 지는 것이 대의정치의 기본 문법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안건이라고 해서 표결 자체를 무산시키는 방식으로 대응한다면 국회는 토론과 결정의 공간이 아니라 숫자로 상대를 마비시키는 장소가 된다.
더구나 헌법은 개헌 절차에 이미 매우 높은 문턱을 두고 있다. 재적 의원 3분의 2 찬성을 요구한다. 일반 법률안보다 훨씬 무거운 기준이다. 이는 개헌이 특정 정파의 힘만으로 이뤄져서는 안 된다는 헌법적 안전장치다. 국민의힘이 개헌안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그 높은 문턱 안에서 반대표를 행사했어야 했다.
이번에 상정된 개헌안은 권력구조 개편이나 중임제 같은 폭발력 큰 내용도 빠져 있었다. 대통령 계엄 선포 시 국회 승인 의무화와 국회의 계엄 해제권 강화 같은 조항이 핵심이었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다시는 국가 비상권력이 민주주의를 압박하지 못하도록 최소한의 통제 장치를 두자는 취지였다.
그런데도 국회는 그 문제조차 표결로 결론 내리지 못했다. 국민의힘은 “이재명 장기집권용 개헌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표결에 참여했어야 한다. 국회 의결은 끝이 아니다. 개헌은 결국 국민투표를 거쳐야 한다. 국민의힘은 자신들이 우려하는 내용을 국민 앞에 드러내고 국민 판단을 받도록 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국민에게 판단 기회조차 가지 않았다. 정치권은 흔히 “국민 뜻”을 말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거리의 구호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헌법이 정한 절차와 표결 규칙 위에서 작동한다. 국회의원이 본회의장에 들어와 표를 던지는 행위는 형식적 절차가 아니다. 민주주의 자체를 떠받치는 최소한의 의무다.
국회는 이미 여러 차례 이런 모습을 반복해왔다. 마음에 들지 않는 안건이 나오면 의장석 점거와 회의장 봉쇄가 벌어졌고 최근에는 아예 집단 퇴장과 표결 거부가 일상이 됐다. 다수당은 힘으로 밀어붙이고 소수당은 회의장을 비우는 방식이 반복되면서 국회는 토론의 공간이라는 본래 기능을 잃어갔다. 그 피해는 결국 국민에게 돌아온다.
정당들은 늘 법치주의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법치주의는 자신에게 유리한 결론을 얻는 기술이 아니다. 절차를 존중하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법률가들이 결과보다 절차를 중시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절차가 흔들리면 누구도 결과를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이번 개헌 표결 불성립은 그래서 더 무겁다. 헌법 개정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헌법을 다루는 국회가 정작 헌법이 예정한 방식 안에서 싸우기를 포기했다는 데 본질이 있다. 반대를 위해 표결장을 비우는 정치가 계속된다면 앞으로 어떤 국가적 논쟁도 정상적으로 결론 내리기 어려워진다.
국회의원은 거리의 운동가가 아니다. 헌법기관이다. 헌법기관의 첫 번째 책무는 마음에 들지 않는 안건이라도 국회 안에서 표결로 책임지는 일이다. 이번 개헌안은 부결될 수도 있었다. 국민적 공감대를 얻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 판단은 표결과 국민투표 과정 속에서 가려졌어야 했다.
헌법은 본회의장 밖에서 싸우라고 만들어진 문서가 아니다. 헌법은 표결로 싸우라고 존재하는 규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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