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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한·베 관계, 투자 협력을 넘어 미래를 함께 만들어야

HO THI LONG AN 기자 2026-09-10 17:18:56
[사진=AI 생성 이미지]

[경제일보] 한국과 베트남 관계가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 2022년 양국 관계가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된 이후, 이제 양국 협력의 성과를 교역액이나 외국인직접투자(FDI), 관광객 수만으로 평가해서는 부족하다.

숫자 뒤에는 이미 서로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온 두 사회가 있다. 한국에 거주하는 베트남인은 35만명을 넘고, 베트남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20만명에 이른다. 다문화가정도 약 10만 가구에 달한다. 두 나라는 더 이상 정상 간 회담이나 정부 간 협정으로만 연결된 관계가 아니다. 서로의 가정과 학교, 일터와 지역사회 속에 이미 깊게 자리 잡았다.

수교 30년을 넘어선 지금, 전략적으로 던져야 할 질문은 하나다.

한·베 관계는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가.

답은 양해각서(MOU)를 몇 건 더 체결하느냐에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미 맺은 합의와 약속을 얼마나 현실의 성과로 만들고, 그것을 양국 국민에게 새로운 부가가치로 돌려줄 수 있느냐다.

◆‘베트남에 투자’에서 ‘베트남과 함께 성장’으로

지난 수십 년간 한·베 경제협력은 비교적 분명한 공식 위에서 움직였다. 한국 기업은 자본과 기술을 들고 베트남에 공장을 세웠고, 베트남은 토지와 노동력, 인프라를 제공했다.

이 모델은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 베트남에는 산업화와 성장의 동력을 제공했고, 한국 기업에는 생산기지와 시장 확대의 기회를 열었다.

하지만 지금의 베트남은 더 이상 저임금 노동력을 앞세운 생산기지에 머물고 싶어 하지 않는다. 기술 이전과 연구개발(R&D) 역량 확보, 청정에너지 전환, 글로벌 가치사슬의 상위 단계 진입을 원한다.

최근 양국이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첨단기술 인력 양성 등을 주요 협력 의제로 올리고 있는 것도 이런 변화와 맞닿아 있다.

하나의 가공공장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기술 생태계는 사람을 키우고 기업을 바꾸며 산업 전체의 생산성을 높인다. 현지 인재를 길러내고, 혁신기업을 촉진하며, 지속적인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제 질문도 달라져야 한다.

“한국이 베트남에 얼마나 투자할 것인가”가 아니라 “한국과 베트남이 세계시장에 내놓을 어떤 기술과 제품을 함께 만들어낼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AI와 반도체, 협력의 질을 가르는 시험대

AI와 반도체 같은 첨단산업 협력은 한·베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의 질을 가늠하는 시험대다.

베트남은 고급 기술인력의 질을 높이고 반도체 생태계를 구축하려 한다. 한국은 글로벌 첨단산업 경쟁 속에서 기술 인력 부족과 공급망 재편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양국의 전략적 이해가 만나는 지점이다.

그러나 협력 방식까지 과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한국이 연구와 설계를 맡고 베트남은 조립과 패키징만 담당하는 구조라면 한계가 분명하다. 베트남 엔지니어가 설계와 연구, 소프트웨어, 데이터 분석 등 지식집약적 가치사슬에 단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협력은 ‘첨단기술 하청’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다.

진정한 전략적 동반자 관계라면 한국은 베트남을 단순한 생산기지가 아니라 공동 R&D 거점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베트남 역시 기술을 받아들이고 함께 혁신할 수 있도록 제도와 인프라, 교육과 인재 기반을 준비해야 한다.

협력의 평등성은 선언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가치사슬의 어느 단계까지 함께 들어가느냐에서 드러난다.

◆ODA와 지방협력도 ‘규모’보다 ‘실질’

양국 지방정부 간 직접 협력이 확대되고 있는 것도 긍정적인 변화다. 인프라와 물류, 스마트시티, 첨단농업 등 협력 분야도 넓어지고 있다.

다만 이런 확대일수록 현실적이고 냉정한 접근이 필요하다.

공적개발원조(ODA)나 지방정부 차원의 민관협력(PPP) 사업은 투입된 자금의 규모나 시설의 첨단성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지역 주민이 실제로 접근할 수 있는지,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지, 삶의 질 개선으로 연결되는지를 봐야 한다.

국제수준의 병원이나 학교도 현지 주민이 이용하지 못한다면 사회적 가치는 제한적이다.

따라서 지역개발 협력은 가장 기본적인 질문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 지역에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한 뒤 금융과 기술을 붙여야 한다. 순서가 바뀌면 협력은 성과보다 외형을 좇게 된다.

◆민간외교, 제도보다 빠르게 움직인다

한·베 관계에는 흥미로운 특징이 있다. 사회의 실제 움직임이 공식 외교보다 빠르다는 점이다.

한국 기업에서 일하는 베트남 노동자, 한국 대학에서 공부하는 베트남 학생, 다문화가정의 구성원,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중소기업과 현지 협력업체 관계자들이 이미 양국을 잇는 ‘현장 외교관’ 역할을 하고 있다.

판 아인 선 베트남우호친선단체연합(VUFO) 회장의 문제의식도 이와 맞닿아 있다. 민간교류가 단순한 문화행사와 친선방문을 넘어 경제·사회적 가치를 함께 만들어내는 단계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외교는 길을 열고 제도를 만든다. 그러나 그 길을 실제로 움직이는 주체는 기업과 대학, 지방정부와 시민이다.

정부 간 합의가 아무리 많아도 기업이 움직이지 않고 연구자가 연결되지 않으며 지역사회가 체감하지 못하면 관계는 오래가기 어렵다.

반대로 민간의 교류와 신뢰가 쌓이면 제도는 그것을 따라 움직인다.

◆다음 30년의 설계자는 청년 세대

앞으로 한·베 관계의 가장 큰 변화를 만들어낼 주체는 양국의 젊은 세대다.

수많은 유학생과 엔지니어, 기자, 청년 기업가들이 두 나라를 오가고 있다. 이들은 단순히 두 언어를 구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양국의 기업문화와 사회심리, 생활방식까지 함께 이해한다.

이보다 강한 연결망은 만들기 어렵다.

한국에서 베트남어 교육을 확대하고, 베트남에서 한국어 교육을 강화하는 것, 공동 연구 프로그램을 늘리고 청년 창업과 혁신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것은 부수적인 교류사업이 아니다.

그것은 앞으로 30년의 한·베 관계를 떠받칠 인적 인프라에 대한 투자다.

무역협정과 투자협정은 정치·경제 환경에 따라 수정될 수 있다. 그러나 함께 공부하고 일하며 쌓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포괄적 전략 동반자’의 의미를 다시 세울 때

30여 년간 이어진 ‘한국이 투자하고 베트남이 받아들이는’ 협력 모델은 이미 충분한 역할을 했다.

다음 단계는 달라야 한다.

함께 투자하고, 함께 연구하며, 함께 인재를 키우고, 함께 세계시장으로 나아가는 구조다.

베트남에는 한국의 산업화 경험과 자본, 기술, 글로벌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한국에는 베트남의 성장하는 시장과 전략적 지리, 젊고 역동적인 인적자원이 필요하다.

서로에게 필요한 것이 이렇게 분명한 관계라면 한쪽은 투자자, 다른 한쪽은 수용자라는 오래된 구도에 머물 이유가 없다.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의 진짜 성적표는 ‘우리가 얼마나 많이 협력했는가’에 있지 않다.

“두 나라가 함께했기 때문에 비로소 만들어낼 수 있었던 새로운 가치가 무엇인가.”

앞으로 한·베 관계의 30년은 바로 그 질문에 답하는 시간이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