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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데스크칼럼] 산업스파이는 간첩인가

한석진 기자 2026-09-14 08:24:57
반도체 제조 모습 [사진=연합뉴스]


[경제일보] 삼성전자가 1조6000억원을 들여 개발한 18나노 D램 국가핵심기술을 중국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에 빼돌린 전직 부장은 지난 4월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6년4개월을 선고받았다. 회사의 핵심 기술을 외국으로 넘겼으니 산업스파이다. 그런데 반도체 기술이 아니라 군사기밀을 외국에 넘겼다면 사람들은 그를 간첩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반도체 한 세대의 기술격차가 국가 산업의 흥망을 좌우하는 시대에도 이 둘을 전혀 다른 범죄로만 봐야 하는지는 따져볼 문제다.
 

형법은 지난 13일부터 달라졌다. 제98조의2 ‘외국 등을 위한 간첩죄’가 시행됐다. 과거처럼 적국만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외국 또는 이에 준하는 단체의 지령이나 사주, 의사 연락을 받아 국가기밀을 탐지하거나 수집·누설·전달한 사람도 간첩죄로 처벌할 수 있게 됐다. 적국이 아니면 간첩죄 적용이 쉽지 않았던 형법의 오래된 빈틈 하나가 메워졌다.
 

산업스파이까지 곧바로 간첩이 된 것은 아니다. 새 형법은 대상을 ‘국가기밀’로 정했다. 대법원은 국가기밀을 군사 분야에만 한정하지 않고 정치·경제·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인정해 왔다. 공개되지 않았고 외부로 빠져나갈 경우 국가안전에 위험을 줄 우려가 있는 정보라면 국가기밀이 될 수 있다는 취지다. 그러나 산업기술보호법상 국가핵심기술이라는 이유만으로 형법상 국가기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법 사이의 틈이 생긴다. 산업기술보호법은 국가핵심기술을 해외로 유출될 경우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민경제 발전에 중대한 악영향을 줄 우려가 있는 기술이라고 규정한다. 국가가 반도체와 배터리, 디스플레이 기술을 기업 재산만의 문제로 보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 기술이 외국으로 넘어가면 국가안보에 영향을 준다고 해놓고 정작 외국 국가권력이 조직적으로 빼내더라도 간첩죄 적용에는 별도의 벽이 남아 있다.
 

실제 유출 규모도 작지 않다. 지난해 경찰이 적발한 기술유출 사건은 179건, 검거자는 378명이다. 해외유출은 33건이었다. 중국으로 향한 사건이 18건으로 절반을 넘었고 반도체·디스플레이·이차전지 등 한국의 주력 산업에 범행이 몰렸다. 국정원이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적발한 해외 기술유출도 96건에 달한다. 기업들이 추산한 피해 예방액은 23조원이다. 반도체가 38건으로 가장 많았다.
 

국회에서도 이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삼성전자 사장 출신인 고동진 의원은 지난달 외국 간첩죄의 상대방에 ‘외국 기업’을 넣고 대상에 ‘국가핵심기술’을 추가하는 형법 개정안을 냈다. 외국 등을 위한 간첩죄의 최저형도 징역 3년에서 10년으로 높이자는 내용이다. 현행법으로는 국가핵심기술을 빼돌리는 산업스파이를 경제간첩으로 처벌하기 어렵다는 것이 법안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외국 기업을 일률적으로 간첩죄의 상대방에 넣는 것은 따져봐야 한다. 국내 배터리업체 연구원이 두 배의 연봉을 받고 미국이나 독일 경쟁기업으로 옮기면서 기술자료를 빼돌렸다면 중대한 범죄다. 그래도 곧바로 미국 간첩이나 독일 간첩으로 부르는 것은 다른 문제다. 외국 기업이 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산업기술 유출과 국가안보범죄 사이의 선을 지워서는 안 된다.
 

미국은 일반적인 영업비밀 절도와 경제간첩을 법률상 구분한다. 외국 정부나 외국 정부기관 또는 그 대리인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 영업비밀을 빼돌렸을 때 경제간첩죄를 적용한다. 중국 회사로 기술이 넘어갔다는 사실만 보는 것이 아니다. 그 뒤에 외국 국가권력이 있는지를 본다. 기업 간 기술절도와 국가가 개입한 기술탈취를 같은 죄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 기업 TSMC를 둔 대만은 한발 더 나갔다. 2022년 국가안전법을 고쳐 국가핵심관건기술의 영업비밀을 외국이나 중국·홍콩·마카오 또는 이들이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조직을 위해 빼돌리는 행위를 경제간첩죄로 처벌하기 시작했다. 첨단기술 유출을 한 기업의 피해로 끝내지 않고 국가안보 문제로 다룬다. 대만 정부가 내세운 이유도 첨단산업 경쟁력과 국가의 경제명맥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한국이 따져야 할 것도 몇 년을 더 감옥에 보낼 것이냐만은 아니다. 외국 정부나 정보기관의 지시를 받거나 국가가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조직을 위해 반도체·배터리·AI의 국가핵심기술을 조직적으로 빼돌렸다면 피해자는 해당 기업 하나에 그치지 않는다. 경쟁국은 개발기간을 줄이고 시장점유율을 높인다. 우리는 수년간 쌓은 기술격차와 투자비, 일자리를 잃는다. 국가가 배후에 있는 기술탈취를 일반적인 기업 범죄와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모든 산업스파이가 간첩은 아니다. 외국 경쟁기업에 돈을 받고 기술을 넘긴 범죄와 외국 국가권력의 지시를 받아 국가핵심기술을 빼돌린 범죄를 똑같이 취급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후자까지 산업기술 유출이라는 이름으로만 부르는 것도 맞지 않는다.
 

군사기밀만 나라를 무너뜨리는 시대는 지났다. 반도체 공정 하나가 수십 년 쌓은 산업 경쟁력을 흔든다. 외국 국가권력이 그 기술을 조직적으로 빼낸다면 이름부터 제대로 붙여야 한다. 산업스파이가 아니라 경제간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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