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일보] 국가 문화유산의 보존과 역사적 가치의 계승을 책임져야 할 국립중앙박물관이 전시품 검증 부실과 이해충돌 논란으로 신뢰의 위기를 자초했다. 독립운동가 박원근의 유묵으로 소개됐다가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중양의 글씨로 판명돼 전시에서 철수한 ‘일반시국은’이 유홍준 관장의 개인 소장품이었다는 사실까지 뒤늦게 드러났다. 유 관장은 국정감사에서 사과했지만, 사과만으로 끝낼 사안이 아니다.
이번 사건의 핵심은 개인 소장품이 공공 전시에 등장했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누가 출품을 제안하고 결정했으며, 누가 검증했는지, 왜 국가 대표 박물관의 심의 절차가 문제를 사전에 걸러내지 못했는지 밝혀야 한다. 관장에게는 소장품 출품과 관련한 판단의 책임을, 실무·심의 담당자에게는 검증 절차 준수의 책임을, 관리·감독 당국에는 제도적 허점을 방치했는지 따질 책임을 물어야 한다.
공적 권한을 가진 사람일수록 사적인 이해관계를 엄격히 배제해야 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어느 개인의 명성이나 취향을 과시하는 공간이 아니다. 국민의 세금과 국가의 권위로 운영되는 공공기관인 만큼 전시품 선정은 사적 인연이 아니라 학술적 가치와 공익을 기준으로 이뤄져야 한다. 관장 본인의 소장품이 자신이 책임지는 기관의 전시에 출품됐다면 이해충돌 가능성을 처음부터 엄격하게 점검했어야 한다. 유 관장은 출품 경위와 판단 과정, 이해충돌 방지 조치가 있었는지를 국민 앞에 소상히 설명해야 한다. 유감을 표명하는 것만으로 공적 책임을 대신할 수는 없다.
실무진과 심의기구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박물관의 유물 선정은 관장 한 사람의 판단만으로 이뤄져서는 안 되며, 출처와 진위, 역사적 의미를 검토하는 전문적 절차를 거쳐야 한다. 특히 관장과 이해관계가 있는 유물이라면 더욱 엄격한 심사가 필요하다. 국정감사에서는 해당 작품이 최초 기획안에 없다가 관장 추천으로 추가됐고, 서예 전문가의 감정과 비교 검증 없이 전시됐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 과정에서 어떤 자료를 근거로 출품을 결정했는지, 작품의 필자와 역사적 의미를 언제 확인했는지 밝혀야 한다. 관장의 지시가 있었는지, 실무진이 독립적으로 판단했는지, 심의가 형식적으로 진행됐는지도 조사 대상이다. 다만 구체적인 지시나 규정 위반이 확인되기 전에 특정 개인의 책임을 단정해서는 안 된다. 사실을 밝힌 뒤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묻는 것이 원칙이다.
문화체육관광부 등 관리·감독 당국 역시 이번 사태를 박물관 내부의 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 국립기관의 전시품 선정과 이해충돌 방지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감독하고, 문제가 드러났을 때 제도를 보완하는 것은 관리·감독 당국의 책무다. 개인 소장품의 공공 전시 활용을 통제하는 기준이 미비했는지, 기관장과 관련된 사안에 별도의 심사 절차가 있었는지, 기존 규정이 있었는데도 집행되지 않았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제도에 허점이 있었다면 이를 방치한 책임을 져야 하고, 규정이 있었는데도 작동하지 않았다면 감독과 이행 점검의 실패를 인정해야 한다. 관장에게만 책임을 돌리고 행정 시스템을 그대로 둔다면 이번 사건은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다.
쇄신은 책임 규명에서 출발해야 한다. 출품 제안부터 선정·심의·철회까지 전 과정을 조사하고 그 결과를 공개해야 한다. 기관장과 고위직의 개인 소장품을 전시에 활용할 경우 사전 신고와 이해관계 공개를 의무화하고, 당사자를 선정·심의 과정에서 배제하는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외부 전문가가 참여하는 독립적 검증 체계를 구축하고 출품 기준과 심의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할 필요가 있다. 조사 결과에 따라 관장과 관련 책임자에게 인사·징계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관리·감독 당국도 제도 개선의 이행 여부를 정기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공공기관의 권위는 직함이나 명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원칙을 지키고 잘못에 책임지는 태도에서 나온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신뢰를 훼손한 사건을 사과 한마디로 봉합한다면 국민 세금으로 유지되는 공공기관의 책임 원칙은 무너진다. 유홍준 관장은 자신의 판단과 출품 경위를 설명하고, 실무·심의 담당자는 검증의 적정성을 입증하며, 관리·감독 당국은 제도적 실패 여부를 밝혀야 한다. 누구도 직위나 권위를 방패 삼아 책임을 피해서는 안 된다. 공공기관의 기본 원칙과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은 책임 소재를 분명히 밝히는 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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