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일보] 나라 곳간이 오랜만에 두둑해졌다. 반도체 호황 덕분이다. 정부는 내년 총지출을 820조9000억원으로 편성했다. 올해보다 12.8% 늘어난 역대 최대 규모다. 반도체 추가 세수를 바탕으로 162조원 규모 미래대응기금도 만든다. AI와 반도체, 피지컬 AI, 데이터센터 등 미래 산업에 대한 투자도 대폭 늘렸다.
돈을 쓸 여력이 생긴 것은 반가운 일이다. 문제는 어떻게 쓰느냐다.
반도체 호황은 영원하지 않다. 메모리 가격은 오르고 내리며, 글로벌 수요와 공급에 따라 세수도 크게 흔들린다. 지금 늘어난 세입을 매년 반복되는 복지와 경상지출로 굳혀버리면 다음 불황 때 부담은 고스란히 빚으로 돌아온다. 호황기에 씀씀이를 키우기는 쉽지만 한 번 늘어난 지출을 줄이기는 어렵다.
정부가 미래대응기금을 만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수가 좋을 때 일부를 떼어 미래 산업과 위기 대응에 쓰겠다는 취지는 타당하다. AI와 반도체, 첨단 제조업에 대한 투자는 지금 놓치면 안 된다. 글로벌 기술 경쟁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전력망과 데이터센터, 연구개발, 인재 양성 같은 기반은 민간 기업만으로 감당하기 어렵다.
그러나 기금이라는 이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162조원이라는 거대한 자금이 국회의 통제 밖에서 움직인다는 우려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무엇을 미래 투자로 볼 것인지 기준을 분명히 하고, 사업별 성과를 공개해야 한다. 기존 예산 사업을 기금으로 옮겨 담거나 정책 실패를 덮는 용도로 쓰여서는 안 된다. 미래라는 이름은 가장 쉽게 예산을 늘리는 명분이 될 수도 있다.
재정의 우선순위도 냉정하게 따져야 한다. AI 예산을 늘리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GPU를 사고 데이터센터를 짓는 것만으로 AI 강국이 되지는 않는다. 전력과 용수, 인재와 연구개발, 중소기업의 AI 전환까지 함께 이어져야 한다. 돈을 많이 쓰는 것과 잘 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복지 지출도 마찬가지다. 저출생과 고령화, 청년 일자리와 지역 소멸에 대한 투자는 피할 수 없다. 다만 현금성 지원을 늘리는 것만으로 구조 문제가 해결되는지는 끊임없이 점검해야 한다. 세금을 더 걷을 수 있을 때는 누구나 복지를 늘릴 수 있다. 재정의 실력은 세수가 줄어들 때도 지속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데서 드러난다.
더 큰 문제는 국가채무다. 정부 계획대로라면 2030년 재정지출은 1000조원에 이르고 국가채무는 1700조원을 넘어선다. 지금은 반도체 호황으로 재정 지표가 좋아 보이지만, 인구 감소와 고령화에 따른 복지비 증가는 이미 예정돼 있다. 미래 세대를 위한 투자를 말하면서 미래 세대가 갚아야 할 빚까지 함께 늘린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정부는 적극재정과 건전재정을 반대말처럼 다뤄서는 안 된다. 경제가 어려울 때 재정이 역할을 해야 하고, 성장 잠재력을 높이는 곳에는 과감하게 투자해야 한다. 대신 호황기에 불필요한 지출을 정리하고 국가채무를 관리하는 것 역시 정부의 책임이다.
이번 예산안은 그래서 시험대다. 반도체가 벌어다 준 돈을 현재의 소비로 끝낼 것인지, 미래의 생산성으로 바꿀 것인지가 갈린다.
재정은 많이 쓰는 데서 힘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쓴 돈이 다시 성장과 세수로 돌아올 때 힘이 생긴다. AI와 반도체 투자도, 복지와 지역 지원도 같은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 821조원이라는 숫자는 크다. 그러나 국민이 기억할 것은 예산의 크기가 아니라 그 돈으로 무엇이 달라졌는지다.
반도체 호황은 우리에게 드문 시간을 벌어줬다. 이 돈을 다음 호황까지 버틸 산업과 인재, 전력망과 기술에 투자해야 한다. 호황의 세수를 호황기의 씀씀이로 끝내서는 안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큰 예산이 아니다. 좋은 시절에 번 돈을 미래의 힘으로 바꾸는 재정의 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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