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일보]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기업의 장부를 넘어 나라 곳간까지 바꾸고 있다. 정부가 예상한 내년 국세수입은 584조4000억원. 올해 본예산보다 크게 늘어난다.
법인세와 소득세가 동시에 증가하는 배경에는 AI 반도체 호황이 자리 잡고 있다. 정부는 이 가운데 최근 10년의 내국세 추세를 웃도는 추가 세수 162조3000억원을 떼어 ‘미래대응기금’을 만들겠다고 했다.
숫자가 워낙 크다 보니 먼저 하나는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162조3000억원 전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반도체 기업이 직접 낸 세금이라는 뜻은 아니다. 정부가 추세선을 웃도는 전체 내국세 증가분을 계산한 금액이고, 반도체 호황은 그 세수 급증을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배경 가운데 하나다.
그럼에도 ‘반도체가 번 세금’이라는 표현이 던지는 질문은 유효하다.
호황기에 갑자기 늘어난 세수는 누구의 돈인가. 지금 살아 있는 국민이 당장 써도 되는 돈인가. 아니면 경기가 꺾인 뒤를 위해 남겨둬야 할 돈인가. 더 멀리 보면 아직 세금을 낼 나이조차 되지 않은 미래세대에게도 일정한 몫이 있는 돈인가.
이형일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후보자가 지난 13일 국회에 제출한 인사청문회 답변에서 짚은 것도 같은 문제다. 그는 대외 불확실성과 구조적 문제에 대응하려면 재정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하다고 했다. 동시에 국가채무와 의무지출이 지나치게 늘어나면 재정 여력을 떨어뜨리고 잠재성장률과 미래세대에 부담을 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두 말은 모순되지 않는다. 경기가 무너질 때 재정은 과감하게 써야 한다. 민간이 움츠러들고 기업이 투자를 미룰 때 정부까지 지갑을 닫으면 불황을 더 깊게 만들 수 있다. 반대로 세수가 예상보다 크게 늘어난 호황기에는 일부를 남겨야 한다.
불황에 쓸 수 있는 정부가 되려면 호황기에 다 쓰지 않는 정부여야 한다. 이것이 재정의 기본이다.
그런 점에서 미래대응기금이라는 발상 자체는 평가할 대목이 있다. 정부는 162조3000억원 가운데 45조4000억원을 청년·성장동력·지방·교육·인재 분야에 쓰고, 12조5000억원으로 신규 국채 발행을 줄일 계획이다. 가장 큰 몫인 104조4000억원은 당장 쓰지 않고 여유자금으로 적립한다. 전체 기금의 64%가량이다.
세수가 더 들어왔다고 한 해에 모두 지출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더구나 반도체는 대표적인 경기순환 산업이다. AI 붐이 지금처럼 계속된다는 보장은 없다. 메모리 가격이 떨어지고 투자 사이클이 꺾이면 기업이익과 법인세는 빠르게 줄어든다. 세수는 내려가는데 한 번 시작한 복지와 보조금, 기관과 사업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재정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일시적인 돈으로 영구적인 지출을 만드는 일이다. 올해만 들어오는 10조원을 근거로 매년 10조원이 필요한 사업을 시작하면 호황이 끝나는 순간 그 차이는 빚이 된다. 세금을 올리거나 다른 지출을 줄이지 않는 한 결국 국채가 빈자리를 메운다.
때문에 미래대응기금의 성패도 ‘얼마를 담았느냐’보다 어떤 돈을 어디까지 쓸 수 있게 하느냐에서 갈릴 것이다.
45조4000억원의 사업지출 가운데 AI와 전략기술, 인재 양성처럼 미래의 생산성을 높이는 투자는 적극적으로 할 수 있다. 오늘의 반도체 호황에서 나온 세금으로 다음 산업을 만드는 것은 세대 간 이전이라기보다 세대 간 투자에 가깝다.
반면 한번 시작하면 끊기 어려운 경상적 복지와 반복성 지원사업을 초과세수에 기대어 늘리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반도체 가격은 내려가도 법으로 정해진 의무지출은 내려가지 않는다.
반도체 사이클은 꺾여도 정부 사업에는 사이클이 없다. 바로 이 점에서 104조4000억원의 여유자금이 중요하다.
정부 설명대로라면 이 돈은 향후 세수 결손이나 예상하지 못한 재정 수요가 발생할 때 재정을 보강하는 일종의 ‘저수지’ 역할을 하게 된다. 방향은 합리적이지만 정부는 일정한 범위에서 추가경정예산을 거치지 않고 기금운용계획 변경을 통해 대응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들고 있다. 신속성은 커지지만, 100조원이 넘는 자금에 행정부의 재량이 커진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돈을 쌓아두는 것만으로 미래세대의 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언제 꺼낼 수 있는지, 무엇에 쓸 수 있는지, 누가 결정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세수 결손이 어느 정도일 때 사용할 것인지, 경기침체의 기준은 무엇인지, 미래투자라는 이름으로 어떤 사업까지 허용할 것인지 법과 제도로 선을 그어야 한다. 특히 기금의 여유자금이 그때그때 정부가 원하는 사업을 담는 별도 예산처럼 운용돼서는 안 된다.
노르웨이의 경험은 참고할 만하다.
노르웨이는 석유와 가스에서 들어오는 정부 순수입을 정부연기금 글로벌(GPFG)에 넣고 해외에 투자한다. 재정에는 기금의 원금을 마음대로 가져다 쓰는 대신 장기적으로 예상 실질수익률에 해당하는 수준을 기준으로 활용한다. 현재 그 기준은 약 3%다. 핵심은 석유로 갑자기 부자가 된 한 세대가 자원을 모두 소비하지 않고 금융자산으로 바꿔 후대와 나누겠다는 데 있다.
물론 한국의 반도체 세수와 노르웨이의 석유 수입을 그대로 비교할 수는 없다. 석유는 땅에서 한 번 꺼내 쓰면 사라지는 국민 자산이고, 반도체 기업의 이익과 세금은 혁신과 생산 활동에서 생긴다. 정부가 기업이 낸 세금을 영구적으로 묶어둘 이유도 없다.
하지만 배울 원칙은 있다. 일시적으로 크게 들어온 돈을 평상시의 소득처럼 생각하지 않는 것.
노르웨이는 석유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한국 재정도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예기’ 왕제편에는 ‘국무구년지축왈부족(國無九年之蓄曰不足)’이라는 구절이 있다. ‘나라에 아홉 해를 버틸 비축이 없으면 부족한 것’이라는 의미다. 이어 3년을 농사지으면 1년치 식량을 남기고, 9년이면 3년치를 비축해야 한다고 했다. 풍년에 남겨 흉년을 견딘다는 오래된 국가운영의 원칙이다.
2500년 전 곡식창고가 오늘의 재정기금으로 바뀌었을 뿐 원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정부의 2027년 예산안은 총지출이 820조9000억원으로 올해보다 12.8% 늘어난다. 동시에 정부는 미래대응기금과 국채 발행 축소를 통해 내년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을 48.3%로 낮추겠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적극적인 지출과 재정안정을 동시에 추구하겠다는 구상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원칙이 필요하다.
우선 경기순환으로 생긴 초과세수와 경제의 기초체력에서 생긴 구조적 세수를 구분해야 한다. 일시적 초과세수는 상시 지출의 재원으로 잡아서는 안 된다.
또한 초과세수의 사용 순서를 정해야 한다. 미래 성장투자, 재정안정 적립, 국가채무 축소 사이의 기준을 사전에 만들어 정권과 경기 상황에 따라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기금에서 돈을 꺼내는 조건도 엄격해야 한다. 불황이나 세수 급감 때는 과감하게 쓰되 단순히 예산을 더 쓰기 위한 우회 통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오늘의 호황을 내일의 고정비로 바꾸지 않는 것이다.
반도체 기업이 잘 벌어 세금이 많이 들어온 것은 축하할 일이다. 그 돈으로 AI와 첨단산업을 키우고 청년에게 기회를 만들며 성장잠재력을 높이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나라 살림은 기업의 분기 실적과 달라야 한다.
기업은 좋은 해에 성과급을 더 줄 수 있다. 국가는 좋은 해의 세수를 보고 수십 년 동안 지급해야 할 약속을 쉽게 늘려서는 안 된다. 앞으로 저출생·고령화에 따른 연금과 의료, 돌봄 지출은 계속 커질 가능성이 높다. 지금 늘어난 돈을 모두 현재의 소비에 써버리면 다음 세대는 호황의 혜택은 누리지 못한 채 그때 만들어진 지출 의무만 넘겨받을 수 있다.
반도체가 벌어준 추가 세수는 현 정부의 돈도, 현 세대만의 돈도 아니다. 호황을 만든 기업과 노동자의 성과에서 나왔지만 국가의 세금이 된 순간 현재와 미래의 국민 모두를 위해 써야 할 자원이 된다. 재정이 돈이 들어올 때보다 그 돈이 사라진 뒤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이유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은 언젠가 끝난다. 그때도 남아 있어야 할 것은 새로 만든 지출의 청구서가 아니라, 다음 위기를 견딜 재정 여력과 다음 산업을 만들어낼 자산이다.
돈이 많이 들어왔을 때 많이 쓰는 정부보다, 돈이 사라질 때를 준비하는 정부가 더 유능하다. 162조3000억원 미래대응기금의 진짜 이름값도 거기서 판가름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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