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일보]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이 오는 24일 워싱턴에서 열릴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중국은 아직 정상회담 개최를 공식 확인하지 않았다. 앞서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과 허리펑 중국 국무원 부총리는 이번 주말 만나 정상회담 의제를 조율할 예정이다. 인공지능(AI)과 희토류, 무역·에너지 등 경제안보 현안이 폭넓게 다뤄질 전망이다.
한국에는 남의 나라 정상회담이 아니다. 미중이 협상 테이블에서 다루는 현안 하나하나가 한국의 주력 산업과 연결돼 있어서다. AI의 중심에는 반도체가 있고 희토류와 핵심광물은 배터리·자동차·항공우주·방위산업에 들어간다. 미국과 중국의 합의와 충돌에 따라 한국 기업의 투자와 생산, 공급망 전략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AI는 특히 그렇다. 베선트 장관은 미국이 중국과 AI가 초래할 공동의 위험을 논의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미중 AI 경쟁이 첨단 반도체와 기술 수출통제를 넘어 안전과 국제규칙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의미다. 세계 AI 산업에서도 안전 규칙을 누가 만들고 집행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이 커지고 있다.
한국은 이 경쟁의 한복판에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이끌고 있고 AI 가속기에 필요한 고대역폭메모리(HBM)에서도 한국 기업의 비중이 크다. 미중 기술 경쟁이 격화될수록 한국 반도체 기업의 기술과 생산시설은 단순한 기업 자산을 넘어 경제안보의 자산이 된다.
미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로이터는 SK하이닉스가 인텔과 미국에서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는 방안을 협의하고 있다고 지난 16일 보도했다. 인텔의 오하이오 공장 일부를 활용하거나 인텔·클라우드 기업 등이 참여하는 합작법인을 만드는 방안이 거론된다. 아직 초기 협의 단계이고 결정된 것은 없다. 하지만 한국 메모리 기업이 처음으로 미국에서 생산할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반도체 공급망이 얼마나 빠르게 재편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여기에는 한국이 고민해야 할 지점도 있다. 미국의 공급망 현지화와 한국의 이해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생산시설을 미국에 두는 것이 시장 접근과 공급망 안정에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핵심 제조기술의 해외 이전과 국내 산업 생태계 약화 가능성도 함께 살펴야 한다. 기업의 투자 판단을 존중하되 국가 차원에서는 어떤 기술과 생산기반을 국내에 반드시 남겨야 하는지 원칙을 세울 필요가 있다.
희토류 문제는 더 절박하다. 중국은 미국이 자국 중심의 핵심광물 공급망을 구축하는 데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주요 핵심광물의 정제 과정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 자료를 분석한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중국의 희토류 정제 비중은 2023년 90% 이상에서 2025년 약 85%로 낮아졌지만 여전히 세계 공급망을 좌우할 수준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희토류 원소인 이트륨은 이런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트륨은 반도체와 항공우주, 제트엔진 코팅 등에 쓰이는 전략 물질이다. 중국은 세계 이트륨 공급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고 수출통제를 통해 공급량을 조절해 왔다. 미국 제조업에서도 공급 부족에 따른 생산 차질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이트륨 문제 역시 미중 정상회담의 주요 현안 가운데 하나로 거론된다.
한국의 취약점도 여기에 있다. 반도체와 배터리, 자동차를 세계에 수출하지만 이를 만드는 핵심광물과 소재 상당 부분은 해외에서 들여온다. 미국이 첨단기술 공급망에서 중국 의존도를 낮추는 속도를 높이면 한국 기업도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세계 제조업의 거대한 생산기지이자 시장인 중국과의 공급망을 단기간에 끊는 것도 현실적이지 않다.
따라서 한국의 대응을 단순히 ‘미국이냐 중국이냐’의 문제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안보와 직결된 첨단기술 분야에서는 동맹국과 협력을 강화하되 핵심 원료와 소재는 특정 국가에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최근 열린 한·중앙아시아 정상회의도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국과 중앙아시아 5개국은 핵심광물과 에너지, 공급망 협력을 주요 의제로 다뤘고 70건이 넘는 협정과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정부는 단순한 원료 수입을 넘어 탐사와 정제, 소재 가공, 완제품 생산까지 협력 범위를 넓히겠다고 밝혔다.
이제 중요한 것은 실행이다. 공급망 다변화는 양해각서 숫자로 평가할 일이 아니다. 광물 탐사와 개발이 실제 정제·가공과 국내 기업의 장기 구매로 이어져야 한다. 핵심광물 개발은 투자 회수 기간이 길고 가격 변동성도 큰 만큼 정부가 정책금융과 비축제도 등을 활용해 민간의 위험을 분담할 필요가 있다. 공급망은 평상시에는 비용의 문제지만 위기가 닥치면 국가안보의 문제가 된다.
AI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이 메모리 반도체를 잘 만드는 것만으로 미래 경쟁력을 보장받기는 어렵다. AI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전력망, 소프트웨어와 AI 모델로 이어지는 산업 생태계를 함께 키워야 한다. 미중이 AI의 기술표준과 안전 문제까지 논의하기 시작했다면 한국도 이미 만들어진 규칙을 받아들이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국제 AI 거버넌스와 기술표준을 만드는 과정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미중 경쟁은 이제 관세 몇 퍼센트(%)를 주고받는 무역전쟁을 넘어섰다. 누가 AI의 규칙을 만들고 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며 핵심광물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느냐를 둘러싼 경제안보 경쟁이다. 중국은 핵심광물 공급망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고 미국은 첨단 반도체와 AI 생태계를 중심으로 자국 공급망을 강화하고 있다.
한국의 운명을 워싱턴과 베이징의 협상 결과에 맡길 수는 없다. 어느 한쪽을 무조건 선택하는 것도, 양쪽의 눈치를 보며 결정을 미루는 것도 해법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택을 강요받았을 때 버틸 수 있는 힘을 먼저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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