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일보] “한두 명 대출해 주면 이번 달은 끝입니다”
서울의 한 은행 직원이 주택담보대출 상담을 앞두고 한 말이다. 고객의 소득과 신용이 아무리 좋아도 지점에 배정된 한도를 다 쓰면 더 빌려줄 수 없다. 인터넷은행에서는 오전 6시 주담대 접수가 시작되자 신청자가 몰려 몇 분 만에 하루 한도가 소진된다. 집을 사려는 사람이 매물보다 대출 가능한 은행부터 찾아다니고 있다.
금융당국은 가계부채를 잡겠다며 은행권 대출 총량을 강하게 조이고 있다. 올해 금융권 가계대출 증가율 목표도 지난해보다 낮췄다. 은행들은 주담대 한도를 줄이고 대출 모집인을 통한 신규 접수를 막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연간 목표치가 빠르게 소진되자 하반기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출 창구부터 좁아졌다.
가계부채가 지나치게 늘면 금융당국이 제동을 걸어야 한다. 다만 누구의 대출을 얼마나 줄일 것인지는 따로 따져야 한다. 지금은 소득이 충분하고 신용도가 높아도 은행의 한도가 차면 돈을 빌릴 수 없다. 차주의 위험을 살펴야 할 은행이 이번 달 대출 잔액부터 계산하는 상황이다.
부동산 시장에서는 이 문제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현금 15억원을 가진 사람은 15억원짜리 아파트를 그대로 살 수 있다. 현금 9억원에 대출 6억원을 보태려던 사람은 대출 한도가 3억원으로 줄어드는 순간 거래를 접어야 한다. 규제가 강해질수록 돈을 빌려 집을 사려는 사람부터 시장에서 빠진다.
첫 집을 마련하려는 무주택자에게는 대출 2억~3억원의 차이가 더 크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많거나 이미 상당한 금융자산을 가진 사람은 대출이 줄어도 버틸 수 있다. 월급을 모아 종잣돈을 만들고 은행 돈을 보태 집을 사려는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같은 소득과 신용을 갖고 있어도 보유 현금이 적으면 집을 살 기회부터 줄어든다.
대출 규제가 집값을 누르는 동안 현금부자에게는 다른 시장이 열린다. 대출이 필요 없는 사람은 규제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다. 특히 입지가 좋은 아파트처럼 수요가 꾸준한 곳에서는 대출이 막혔다고 모든 매수자가 사라지지 않는다. 대출이 필요한 경쟁자만 줄어드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이미 계약한 사람의 사정은 더 다급하다. 집을 사기로 하고 계약금을 지급한 뒤 잔금대출을 알아보다가 은행 한도가 막혀 거래를 포기하는 사례가 나오고 있다. 토지거래허가를 신청하고 약정서까지 썼는데 돈을 구하지 못해 계약이 무산됐다는 현장 이야기도 들린다. 계약할 때 가능했던 자금계획이 잔금 직전에 뒤집히면 그 손실은 매수자가 부담한다.
부동산 매매는 수개월에 걸쳐 진행된다. 계약금과 중도금, 잔금 날짜가 정해지고 기존 주택 처분과 이사 일정까지 맞물린다. 매수자는 계약 전에 은행 상담을 받고 받을 수 있는 대출 규모를 계산한다. 계약 뒤 대출 한도가 갑자기 줄면 개인이 손쓸 방법은 많지 않다. 정책이 바뀐 대가는 결국 계약 당사자가 자기 돈으로 치른다.
정부는 서울과 수도권에 주택을 더 공급하겠다고 한다. 그린벨트 해제까지 검토하면서 몇 년 뒤 들어설 집은 늘리려 한다. 그런데 지금 집을 사려는 무주택자의 자금줄은 더 좁아지고 있다. 공급대책은 미래의 집을 늘리는데 금융정책은 현재의 실수요자를 시장 밖으로 밀어낸다. 두 정책이 따로 움직이면 실수요자는 집을 어디서 어떻게 사야 할지 계산하기 어려워진다.
차주의 상환능력을 따지는 제도는 이미 있다. DSR은 소득과 원리금 부담을 따져 대출 가능 규모를 정한다. 스트레스 DSR은 앞으로 금리가 오를 위험까지 반영한다. 이런 심사를 통과한 사람도 은행의 연간 총량이 찼다는 이유로 대출을 거절당한다면 DSR 심사의 의미부터 흐려진다.
가계부채를 관리하려면 상환능력이 떨어지는 대출을 더 엄격하게 가려내야 한다. 소득보다 빚이 지나치게 많거나 담보가치에 비해 대출 규모가 큰 경우를 조이는 방식이 맞다. 은행에 일정한 숫자를 주고 그 선을 넘지 말라고 하면 은행이 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창구를 닫는 것이다.
당국과 은행은 그렇게 숫자를 맞출 수 있다. 하지만 대출이 막혀 계약을 포기한 사람의 손실은 그 숫자 밖에 남는다. 더구나 실수요자 피해가 커질 때마다 무주택자나 잔금대출에 예외를 붙이면 규칙은 갈수록 복잡해진다. 수억원이 오가는 주택 거래에서 대출 가능 여부를 정부 발표가 나올 때마다 다시 확인해야 한다면 시장의 예측 가능성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집값을 잡으려면 과도한 빚으로 주택을 사는 수요를 억제해야 한다.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무리하게 돈을 빌려주는 은행도 막아야 한다. 그러나 대출이 필요한 사람부터 시장에서 밀어내면 남는 쪽은 자금력이 충분한 사람들이다. 거래량이 줄었다는 숫자만으로 그런 시장을 안정됐다고 부르기는 어렵다.
은행은 고객이 이번 달 몇 번째로 찾아왔는지를 볼 곳이 아니다. 그 사람이 빌린 돈을 갚을 수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 집값을 잡는다며 대출 문부터 닫으면 먼저 밀려나는 쪽은 무주택 실수요자다. 현금이 많은 사람만 남는 시장에서는 주거 사다리가 다시 놓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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