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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기름 한 방울 안 나는데 유럽 간다…한국산 경유 9만t '1만9000㎞ 수출길'

김태휘 인턴 2026-09-04 17:39:05

프리아모스호 이달 북서유럽 향할 듯

유럽 경유 마진 배럴당 100달러 돌파

세계 5위 정제능력 K정유에 수출 기회

[사진=ChatGPT]

[경제일보] 원유가 한 방울도 생산되지 않는 한국에서 정제한 경유가 1만9000㎞ 떨어진 유럽으로 향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분쟁으로 글로벌 정제유 공급망이 흔들리면서 세계 5위 수준의 정제능력을 갖춘 한국 정유업계가 유럽의 공급 공백을 메울 대체 공급처로 떠오르는 모습이다.

4일 블룸버그 등 외신에 따르면 유조선 '프리아모스(Priamos)'호는 이달 한국산 경유 약 9만t을 싣고 북서유럽으로 향할 예정이다. 최종 목적지로는 영국이나 네덜란드 로테르담이 거론되고 있다. 글로벌 원자재 중개업체 트라피구라가 거래를 주선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프리아모스호는 한국에서 출발해 수에즈운하를 거쳐 1만9000㎞ 이상을 항해할 전망이다.

한국산 경유가 유럽까지 향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국내 정유사들이 생산한 석유제품은 운송비 등을 고려해 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수출된다. 하지만 최근 유럽의 경유 가격이 아시아보다 크게 뛰면서 장거리 운송비를 감수하고도 수익을 낼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에너지 중개업체 PVM에 따르면 유럽과 아시아 경유 가격 차이를 나타내는 지표는 관련 통계가 시작된 2023년 이후 가장 큰 폭으로 벌어졌다.

배경에는 글로벌 경유 공급난이 있다. 세계 2위 경유 수출국인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정유시설 공격 등에 따른 자국 내 연료 부족에 대응하기 위해 경유 수출 금지 조치를 오는 9월 30일까지 연장했다. 여기에 중동 전쟁으로 현지 정유시설과 해상 운송에 차질이 발생하면서 유럽이 기존에 공급받던 경유 물량까지 줄어들었다. 유럽의 경유 수입량은 지난 1월 하루 197만배럴에서 7월 156만배럴까지 감소했다.

공급 부족은 가격으로 이어지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최근 유럽의 경유 크랙스프레드(원유와 석유제품 가격 차이)는 배럴당 100 달러를 넘어서며 사상 최고 수준까지 치솟았다. 글로벌 시장에서 부족한 경유 공급량은 하루 130만~140만 배럴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가을철 유럽 정유시설의 정기보수와 겨울철 난방유 수요까지 겹칠 경우 수급 부담이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정제유 공급 부족은 국내 정유업계에는 기회다. 한국은 원유를 사실상 전량 수입하지만 하루 320만 배럴이 넘는 정제능력을 갖춘 세계 5위 수준의 정유 강국이다. SK에너지·GS칼텍스·에쓰오일·HD현대오일뱅크 등 국내 정유사들은 대규모 정제·고도화 설비를 기반으로 원유를 들여와 경유와 휘발유, 항공유 등 고부가가치 석유제품으로 만들어 수출하는 구조를 구축했다.

실제 경유는 국내 정유업계의 최대 수출 제품이다. 한국석유공사 페트로넷에 따르면 올해 1~5월 국내 정유사가 수출한 석유제품은 1억8801만 배럴로 이 가운데 경유가 7636만 배럴로 40.6%를 차지했다. 이번 유럽행이 일회성 거래를 넘어 추가 수출로 이어질 경우 국내 정유사 입장에서는 높은 정제마진과 수출 물량 확대 효과를 동시에 기대할 수 있다.

한편 정유업계에서는 국내 수급에 차질이 없는 범위에서 잉여 경유의 수출을 보다 탄력적으로 허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국내 경유 소비가 감소하면서 수출하지 못한 물량은 재고로 쌓일 수밖에 없는 만큼 글로벌 공급 부족으로 한국산 석유제품 수요가 커진 시기를 수출 확대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경유 수급이 타이트한 상황에서 수출을 늘릴 기회가 될 수 있는데 정부의 수출 제한이 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라고 했다.

다만 유럽 수출이 새로운 고정 시장으로 자리 잡을지는 지켜봐야 한다. 중국의 석유제품 수출 확대나 러시아·중동의 공급 정상화로 유럽과 아시아의 가격 차이가 좁혀질 경우 1만9000㎞에 달하는 장거리 운송의 경제성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글로벌 경유 공급난이 얼마나 장기화하는지와 국내 수급 안정을 전제로 한 수출 운용의 탄력성이 한국 정유업계의 유럽 시장 확대를 좌우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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