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일보] AI 반도체 호황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대규모 증설에 나서면서 국내 반도체 장비업체의 수주도 늘고 있다. 하지만 장비업체가 주문을 확보하고도 핵심 부품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일부 부품은 납기가 최대 40개월까지 늘어난 사례도 있다. 수백조원 규모의 팹 투자가 실제 생산능력 확대로 이어지려면 팹과 장비에 투입되는 투자액만 볼 것이 아니라 장비 아래 단계인 핵심 부품의 생산능력과 공급망부터 함께 키워야 한다.
반도체 생산라인은 팹과 장비만으로 돌아가는 구조가 아니다. 대기업이 증설을 결정하면 장비업체가 생산설비를 제작하고, 이 과정에서 장비에 필요한 핵심 부품을 여러 업체로부터 조달한다. 이때 특정 부품의 공급이 늦어지면 장비 제작 일정에도 차질이 생길 수 있다. 팹 건설과 장비 발주가 계획대로 진행되더라도 부품 조달이 지연되면 결국 생산라인 가동 일정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부품 공급이 병목으로 이어지는 배경에는 생산능력을 단기간에 확대하기 어려운 구조가 있다. 장비업체는 수주 물량에 맞춰 생산계획을 조정할 수 있지만 부품업체는 설비를 늘린 뒤 인증과 품질검증까지 거쳐야 한다. 반도체 기업들의 투자가 동시에 확대되면 부품 수요는 빠르게 늘어나지만 생산능력이 같은 속도로 따라가기는 어렵다.
해외 의존도가 높은 부품은 공급망 관리가 더욱 까다롭다. 국내 장비업체의 주문이 증가하더라도 해외 부품업체가 국내 수요에 맞춰 생산능력을 확대한다는 보장은 없다. 특히 일본산 의존도가 높은 핵심 부품의 증설 속도가 수요 증가를 따라가지 못하면 국내 장비업체의 생산 일정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특정 해외 업체의 생산계획에 국내 장비 생산이 영향을 받는 구조도 부담이다.
장비 국산화율을 높이는 것만으로 공급망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국내 업체가 장비를 생산하더라도 핵심 부품을 해외 특정 업체에 의존하면 해당 부품의 납기와 생산계획에 따라 장비 공급 일정이 달라질 수 있다. 장비 국산화와 함께 주요 부품의 국내 생산능력을 키우고 공급처도 늘려야 한다.
기업의 투자계획 역시 공급망 전체를 고려해 짤 필요가 있다. 대기업은 팹 투자계획과 예상 장비 물량을 장비업체에 조기에 공유하고, 장비업체는 납기가 긴 부품을 미리 확보할 수 있도록 발주와 공급계약 일정을 앞당겨야 한다. 국내에서 대체할 수 있는 품목은 국산화와 생산설비 확대를 병행하고, 단기간에 국산화하기 어려운 품목은 복수의 해외 공급처를 확보해 특정 업체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
정부의 소부장 지원도 장비 연구개발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 국내 공급능력이 낮고 설비 증설에 오랜 시간이 필요한 핵심 부품을 선별해 생산시설 투자를 지원하고, 수요기업과 부품업체가 장기 공급계약을 맺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대기업의 팹 투자 시점과 부품업체의 증설 시점 사이에서 발생하는 시간차도 줄일 수 있다.
반도체 증설 경쟁에서 투자 규모만으로 성과를 판단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팹과 장비에 자금이 투입됐다는 사실보다 실제 생산라인이 예정된 시점에 가동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팹과 장비, 부품으로 이어지는 공급망 전체의 준비 수준을 투자 단계부터 살펴야 한다. 수백조원 규모의 투자가 생산능력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부품이 가장 늦게 따라오는 구조부터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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