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일보] 유럽연합(EU)의 환경규제가 국내 수출기업에 새로운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다. 지난 8월부터 적용된 포장 및 포장폐기물 규정(PPWR)에 대해 EU에 수출하거나 수출을 계획하는 국내 기업 10곳 중 8곳 이상이 내용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환경보호라는 취지와 별개로 규제에 대응할 인력과 자금이 부족한 중소기업에는 수출 경쟁력을 좌우할 문제가 됐다. 미국의 관세 장벽과 중국의 저가 공세에 대응하기도 벅찬 기업들이 유럽의 환경규제까지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이 27일 발표한 조사 결과는 우려스럽다. EU에 수출하거나 수출을 계획하는 국내 기업 610곳을 조사한 결과, 82.5%가 PPWR을 전혀 모르거나 개략적인 내용만 알고 있다고 답했다. 자사 제품에 규정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진단을 마쳤거나 진행 중인 기업은 16.7%에 그쳤다. 이미 적용되기 시작한 규정에 대해서도 상당수 기업이 구체적인 대응 방안을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PPWR은 포장폐기물을 줄이고 재활용을 확대하기 위해 EU가 도입한 규정이다. 지난 8월 12일부터 포장재의 중금속과 식품 접촉 포장재의 과불화화합물(PFAS) 제한, 기술문서 및 적합성 선언서 작성 등 기본 의무가 적용되기 시작했다. 2028년에는 통일된 포장 표시제도가 도입되고, 2030년부터는 재활용성과 재생원료 사용, 포장 최소화 등에 관한 주요 의무가 단계적으로 강화된다. 규제 대상도 플라스틱에 한정되지 않는다. 종이와 유리, 금속 등 다양한 포장재가 포함되며 제품 판매용뿐 아니라 운송용 포장도 영향을 받는다.
문제는 기업들의 준비 수준이다. 조사에서 플라스틱 포장재를 사용하는 기업 356곳 가운데 절반 이상은 재생원료 공급자 증빙이나 재활용성 평가, 확대생산자책임(EPR) 신고에 필요한 자료 등을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주요 애로사항으로는 전문인력 부족(32.3%)과 시험·인증·컨설팅 비용 부담(30.3%)이 꼽혔다. 포장재를 바꾸는 것만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공급업체의 원료 정보부터 시험성적서와 기술문서까지 관리해야 하는 만큼 중소기업에는 상당한 부담이다.
비용을 감당할 여력도 충분하지 않다. 규제 대응에 추가 비용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한 기업 577곳 가운데 81.6%는 그 비용을 거래가격에 전혀 반영하지 못하거나 25% 미만만 반영할 수 있다고 답했다. 유럽 바이어와의 가격 협상력이 약한 중소기업일수록 부담을 자체적으로 떠안을 가능성이 크다. 환경규제가 수출단가와 이익률을 압박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EU의 환경규제를 일방적인 무역장벽으로만 바라볼 일은 아니다. 폐기물을 줄이고 자원순환을 촉진하려는 정책 목표에는 정당성이 있다. 회원국마다 달랐던 포장 관련 규칙을 통일하면 장기적으로 기업의 행정 부담을 줄이는 효과도 기대된다. 다만 새로운 기준을 충족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비용은 기업 규모에 따라 크게 다르다. 대응 역량이 부족한 기업에는 환경기준이 사실상 시장 진입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정부의 지원은 규정 안내에서 실제 이행 지원으로 옮겨가야 한다. 설명회와 안내자료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업별 규제 적용 여부를 진단하고 필요한 시험과 인증, 기술문서 작성까지 연결하는 실무 지원이 중요하다. 전문인력을 자체적으로 확보하기 어려운 중소기업에는 공동 컨설팅과 인증비용 지원을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업종별 표준 대응자료를 마련하면 기업마다 같은 규정을 해석하고 서류를 준비하는 데 드는 비용도 줄일 수 있다.
수출기업과 포장재 공급업체의 협력도 강화해야 한다. 완제품을 수출하는 기업이 포장재의 원료 구성과 재활용 가능성을 혼자 입증하기는 어렵다. 포장재 제조업체와 시험기관, 수출기업이 관련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체계가 뒷받침돼야 한다. EU가 세부 기준을 단계적으로 확정하는 만큼 정부는 시행 일정과 해석 지침의 변화를 신속히 전달하고, 기업의 애로사항을 유럽 당국과 협의하는 통상외교에도 나서야 한다.
중국 고전 <예기(禮記)>에는 ‘범사예즉립 불예즉폐(凡事豫則立 不豫則廢)’라는 말이 있다. 모든 일은 미리 준비하면 이루어지고, 준비하지 않으면 실패한다는 뜻이다. 지금 국내 수출기업이 처한 상황에 그대로 적용되는 경구다. EU 환경규제는 갑자기 등장한 장벽이 아니다. 시행 일정이 예고됐고 상당수 의무는 앞으로 단계적으로 강화된다. 그럼에도 기업들의 이해와 준비가 부족하다는 것은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대응할 시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준비를 미룰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기업 역시 환경규제 대응을 일회성 인증 업무로 취급해서는 곤란하다. 포장 설계와 원료 구매, 생산, 물류, 해외영업을 연결해 관리하는 체계가 요구된다. 특히 EU 거래처가 요구하는 자료와 계약 조건을 미리 확인하고 비용 부담을 납품가격에 어떻게 반영할지 협상해야 한다. 대응이 늦어질수록 포장재 교체와 인증 지연으로 기존 거래가 흔들릴 위험이 커진다.
세계 무역의 경쟁 조건은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관세와 가격뿐 아니라 환경기준을 충족하고 이를 입증하는 능력까지 시장 진입의 조건이 됐다. 이번 조사에서 드러난 준비 부족을 기업의 무관심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정부는 중소기업이 실제로 규정을 이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기업은 제품과 공급망의 관리 수준을 높여야 한다. 유럽 시장을 지키는 첫걸음은 거창한 수출 전략이 아니라 이미 시행된 규정부터 제대로 이해하고 충족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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