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일보] 세계 반도체 산업이 거대한 역설에 빠졌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대만 TSMC와 네덜란드 ASML은 인공지능(AI) 혁명에 힘입어 사상 최고 수준의 실적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주식시장은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지난 11월 6일 코스피는 6.02% 폭락해 5059.69로 마감했다. 삼성전자는 6.35%, SK하이닉스는 10.44% 급락했다. 미국 중간선거 이후 AI 데이터센터 규제 강화에 대한 우려가 세계 금융시장을 뒤흔든 결과다.
불과 석 달 전인 7월에도 비슷한 충격이 있었다. 중국 상하이의 아이성나가 침지형 심자외선(DUV) 노광장비 생산에 착수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세계 반도체주가 급락했다. 당시 보도된 중국의 생산 목표는 2026년 5대, 2027년 20대였다. 네덜란드 ASML이 구축한 세계적인 노광장비 공급망에 비하면 미미한 규모였지만 시장은 중국의 기술 추격이 장기적으로 반도체 산업질서를 바꿀 가능성에 반응했다.
7월의 충격이 중국의 기술 자립에 대한 두려움이었다면 11월의 충격은 미국의 AI 투자와 규제에 대한 불안이다. 두 사건은 서로 다른 원인에서 발생했지만 하나의 사실을 가리킨다. 반도체 산업의 운명은 더 이상 반도체 기업의 기술력과 생산능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가안보와 통상정책, 국제금융과 정치권력, 에너지와 데이터센터, 인공지능의 경제성까지 모두 결합된 복합적인 세계 패권경쟁으로 발전하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 설계와 AI 플랫폼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다. 엔비디아와 주요 클라우드 기업들이 세계 AI 인프라 투자를 이끌고, 미국의 반도체 설계 소프트웨어와 핵심 장비 기술은 국제 공급망의 중요한 기반이다. 미국 정부가 첨단 반도체와 제조장비의 대중국 수출을 제한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기술적 영향력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기술 봉쇄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고 있다. 중국은 외국에서 구매할 수 없는 기술을 자체 개발하기 위해 국가적 자원을 집중하고 있다. 2002년 설립된 상하이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SMEE)를 비롯한 장비기업들이 장기간 축적한 기술에 화웨이 관련 기업과 상하이 국유자본이 결합하면서 새로운 노광장비 개발체제를 형성하고 있다.
중국산 침지형 DUV의 등장 자체는 의미 있는 기술적 진전이다. 그러나 아직 ASML과 동등한 상업적 경쟁력을 확보했다는 증거는 부족하다. 노광장비는 회로의 미세한 선폭을 구현하는 능력뿐 아니라 정렬 정확도와 웨이퍼 처리량, 장비 가동률, 장기 안정성, 실제 생산 수율을 모두 검증해야 한다. 5대의 생산 목표가 수백 대의 안정적인 공급능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미국의 제재가 중국의 발전을 늦추는 동시에 중국의 국산화 투자를 자극한다는 사실이다. 제재가 무력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고, 제재만으로 중국의 기술 발전을 영원히 봉쇄할 수 있다고 믿어서도 안 된다.
네덜란드의 ASML은 이러한 국제질서의 모순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세계에서 상업용 첨단 EUV 노광장비를 독점적으로 공급하는 기업이지만 그 기술은 독일의 초정밀 광학계, 미국의 광원기술, 일본과 여러 나라의 소재·부품이 결합된 결과다. 네덜란드의 기술패권은 국제적 분업과 협력의 산물이다.
ASML은 2026년 3분기에 약 116억6000만 유로의 매출과 약 49억6000만 유로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회사는 AI 관련 수요가 강해 2027년과 2028년의 계획된 공급량이 고객 수요를 충족하지 못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중국의 기술 추격에도 불구하고 첨단 노광장비의 공급 부족이 이어질 가능성을 보여준다.
대만 TSMC의 실적 역시 놀랍다. 3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50.9% 증가했고, 7나노 이하 첨단 공정이 전체 웨이퍼 매출의 79%를 차지했다. 세계 AI 반도체의 상당 부분이 대만의 첨단 생산 생태계에 의존한다. 그러나 대만은 미·중 갈등과 대만해협의 지정학적 위험에 동시에 노출돼 있다. 반도체 산업의 번영이 국제적 평화와 안정에 얼마나 깊이 의존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국은 이 복잡한 경쟁의 한가운데 있다. 삼성전자는 3분기 매출 195조3000억원, 영업이익 107조4000억원을 발표했다. SK하이닉스도 매출 약 104조6000억원, 영업이익 약 83조3000억원으로 사상 최고 수준의 실적을 기록했다. AI 메모리 수요 확대와 반도체 가격 상승, HBM과 서버용 D램의 경쟁력이 실적 개선을 이끌었다.
그런데 이처럼 뛰어난 실적에도 시장은 폭락했다. 이는 투자자들이 현재의 이익보다 미래의 지속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 중간선거 이후 민주당의 의회 장악으로 AI 데이터센터에 대한 규제가 강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됐다.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와 용수 사용, 지역사회 부담, 투자 수익성에 대한 논쟁이 반도체 수요 전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규제 강화 가능성이 곧 AI 투자 중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미국 나스닥은 11월 5일 5.52% 급락한 뒤 6일에는 1.1% 반등했다. 시장은 공포와 기대 사이에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투자자는 단기 주가 변동과 기업의 장기 경쟁력을 구분해야 한다.
한국 반도체 산업이 준비해야 할 과제는 분명하다. 첫째, HBM4와 차세대 D램, 첨단 패키징에서 기술적 우위를 확대해야 한다. 둘째, 중국의 범용 메모리 공급 확대에 대비해 원가 경쟁력과 생산 효율을 높여야 한다. 셋째, 노광장비와 소재, 설계 소프트웨어와 첨단 공정장비의 전략적 취약성을 줄여야 한다. 넷째, 미국과의 기술동맹을 강화하면서 중국과의 합법적이고 안정적인 경제관계도 현실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무엇보다 한국은 AI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단순한 메모리 제조에 국한해서는 안 된다. AI 데이터센터와 에너지, 로봇과 자율주행, 스마트공장과 의료, 농업과 물류를 연결하는 피지컬 AI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반도체를 만드는 능력과 반도체를 활용해 새로운 산업을 창조하는 능력이 함께 발전해야 한다.
정부 역시 반도체 산업을 개별 기업의 투자 문제로만 다뤄서는 안 된다. 전력과 용수, 산업용지와 전문인력, 연구개발과 금융, 국제통상과 국가안보를 통합하는 장기 전략이 필요하다. 첨단 기술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술의 지속성은 국가의 정책적 일관성과 인재를 존중하는 사회문화에서 나온다.
중국의 노광장비 5대는 아직 한국 반도체 산업을 위협할 만한 생산능력이 아니다. 그러나 중국의 장기적인 기술 추격을 가볍게 볼 수 없다는 경고다. 미국의 AI 규제 논쟁 역시 당장 AI 산업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막대한 투자가 지속 가능한 수익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새로운 시험이다.
결국 반도체 패권은 세 가지 능력의 경쟁으로 압축된다.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능력, 그 기술을 안정적으로 생산하는 능력, 그리고 그 기술을 인간과 산업에 유익한 가치로 전환하는 능력이다.
한국이 지켜야 할 것은 오늘의 주가가 아니라 내일의 경쟁력이다. 중국의 기술 추격을 두려워하는 데 머물러서도 안 되고, 사상 최대 실적에 취해 미래의 위험을 잊어서도 안 된다. 세계 반도체 산업의 중심에서 새로운 기술과 시장을 창조해야 한다.
반도체는 산업의 쌀을 넘어 인공지능 문명의 두뇌가 됐다. 이제 대한민국은 그 두뇌를 잘 만드는 나라에서 나아가 인공지능 문명의 미래를 설계하는 나라가 돼야 한다. 그것이 사상 최대 실적과 증시 폭락이 공존하는 2026년 11월, 한국 반도체 산업이 찾아야 할 역사적 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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