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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200억 달러 장외매입, 외환당국은 왜 설명하지 않나

이창원 기자 2026-09-03 12:00:00

ADR 자금 국내 유입과 대규모 장외매입

원화 강세 완충·외화 대응 여력 보강 명분

정부 개입 원칙·외평기금 투명성 시험대

[사진=ChatGPT]

[경제일보] SK하이닉스가 지난 7월 미국 자본시장에서 조달한 265억 달러가 한국 외환정책의 원칙을 묻는 문제로 번졌다. 로이터 등의 보도대로라면 외환당국은 SK하이닉스의 조달금 가운데 약 200억 달러를 장외에서 사들였다. 우리 돈 27조원이 넘는 규모다.
 
현재까지 정부와 한국은행, SK하이닉스는 이 거래에 대해 입장을 밝히지 않았고, 거래 시점과 환율, 구체적인 계약 방식도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매입 사실과 목적을 정부가 공식 확인한 것처럼 단정할 단계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번 보도가 던지는 질문은 가볍지 않다.
 
SK하이닉스의 조달금은 AI 반도체 생산능력 확충을 위한 공장과 설비 투자 등에 투입될 예정이다. 문제는 이 거액의 달러가 국내로 유입되는 과정이다. 상당액을 원화로 바꾸면 외환시장에는 그만큼의 달러 매물이 쏟아진다. 또 달러 공급이 갑자기 불어나면 원화 가치에는 단기간에 상당한 상승 압력이 가해질 수 있다.
 
최근 시장 상황도 민감했다. 원화는 지난 6월 말 달러당 1550원 안팎까지 밀린 뒤 두 달 사이 12% 넘게 반등했다. 이 국면에서 수백억 달러의 일회성 물량까지 더해지면 변동성이 급격히 커질 수 있다. 외환시장은 방향보다 속도에 더 쉽게 다친다.
 
원화가 경제의 기초체력을 반영해 서서히 오르는 것과 특정 기업의 대규모 자금 이동 때문에 며칠 사이 급격히 치솟는 것은 다르다. 수출기업은 환율을 전제로 가격과 손익을 짜고, 수입기업은 결제계획을 세우며, 외국인 투자자는 환차손익을 계산한다. 예측 가능한 변화에는 적응할 수 있지만 급격한 쏠림에는 대응할 시간이 없다.
 
로이터 보도대로 외환당국이 SK하이닉스 물량의 상당 부분을 장외에서 받아냈다면, 시장 충격을 완화하려는 조치로 해석할 수 있다. 로이터 역시 원화의 급격한 강세를 누그러뜨리고 외화 여력을 보강하려는 성격으로 이번 거래를 전했다.
 
외환당국이 최근 상당한 규모의 달러를 시장에 공급해 온 것은 확인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당국은 원화 약세가 심했던 지난해 4분기 224억6700만 달러, 올해 1분기 136억2800만 달러를 외환시장에서 순매도했다. 두 분기 동안 풀어놓은 달러만 360억 달러를 넘는다. 그만큼 외화 대응 여력을 다시 보강할 유인이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은 가능하다.
 
원화가 급락할 때 달러를 팔아 속도를 늦췄다면, 반대로 대규모 달러 공급으로 원화가 급등할 때 일부를 다시 흡수하는 것은 외환시장 안정이라는 정책 목적에도 부합한다. 따라서 시장안정 차원의 매입이었다면 정책적 명분은 충분하다.
 
쟁점은 매입 자체가 아니다. 외환당국이 무엇을 지키기 위해 200억 달러를 움직였느냐다. 시장인가, 특정 환율인가.
 
외환정책은 본래 한 가지 긴장을 품고 있다. 환율은 시장에 맡겨야 하지만 시장이 한쪽으로 급격히 쏠릴 때는 당국이 손을 놓고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정부가 원하는 환율을 만들어내기 시작하면 시장안정은 환율 수준을 관리하는 정책으로 변질된다. 그래서 개입에는 선이 필요하다.
 
외환당국이 지켜야 할 것은 환율의 특정한 ‘수준’이 아니라 시장의 ‘질서’다.
 
원화가 어느 수준에서 거래돼야 하는지는 기본적으로 시장이 판단할 몫이다. 수출기업에 유리하다는 이유로 원화를 의도적으로 약하게 만들거나, 물가를 잡겠다고 특정 환율을 사실상의 목표로 삼는 것은 정부가 시장가격을 대신 정하는 일이다. 시장의 가격발견 기능을 흔들 뿐 아니라 교역 상대국과의 환율 갈등을 자초할 수도 있다.
 
반대로 일회성 대규모 외화 유입 등으로 수급이 단기간에 한쪽으로 쏠릴 때 그 충격을 완화하는 것은 당국의 역할이다.
 
환율의 수준은 시장이 정하되, 그 가격을 찾아가는 시장의 질서는 당국이 지켜야 한다.
 
이번 200억 달러 거래를 따져봐야 할 기준도 여기에 있다.
 
로이터 보도대로 265억 달러 가운데 약 200억 달러를 외환당국이 흡수했다면 전체의 4분의 3이 넘는다. 시장 충격을 흡수하기 위한 일시적 조치였다면 개입 자체를 문제 삼을 이유는 크지 않다. 수백억 달러가 한꺼번에 현물환시장으로 쏟아지는 것을 피하는 것은 중앙은행과 외환당국이 충분히 검토할 수 있는 선택이다.
 
그렇다고 200억 달러라는 숫자의 무게까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이 정도 규모의 거래라면 어떤 원칙이 적용됐는지는 물어야 한다. 다른 기업이 같은 규모의 외화를 들여와도 같은 방식으로 대응할 것인가. 무엇보다 외환당국이 개입에 나서는 수급 충격의 기준은 무엇인가.
 
현재 공개된 정보만으로 이번 거래를 특정 기업에 대한 특혜로 규정할 근거는 없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런 거래가 반복될 때 적용할 보편적 기준이다.
 
한국 외환시장의 수급 구조는 이미 달라졌다. 거래 규모가 커졌다면 외환정책의 규칙도 그에 맞춰 정교해져야 한다. 그래서 이제 외환개입에도 ‘사후 설명의 원칙’이 필요하다.
 
한국 외환당국은 현재 외환 순거래액을 일정한 시차를 두고 공개한다. 과거와 비교하면 투명성이 상당히 높아졌다. 하지만 얼마를 사고팔았는지는 알 수 있어도 왜 그런 판단을 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외환개입의 세부 내용을 실시간으로 공개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개입 시점과 가격, 규모를 공개하면 시장이 당국의 대응 패턴을 역이용할 수 있다. 때문에 외환정책에는 불가피하게 비밀이 필요하고 정책당국의 재량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비밀이 필요하다는 것과 불투명해도 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다. 거래가 끝난 뒤 설명이 비어 있는 자리는 추측과 개입설이 차지한다.
 
이번에도 200억 달러라는 거대한 거래가 정부 발표가 아니라 외신의 익명 취재를 통해 알려졌다. 거래의 세부 조건은 공개하지 않더라도 정책 목적과 판단 원칙 정도는 사후에 설명할 필요가 있다.
 
시장 변동성을 완화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앞서 사용한 외화 여력을 보강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정책적 판단이 있었는지 말이다.
 
외국환평형기금도 마찬가지다. 외평기금은 외환시장이 급격히 흔들릴 때 충격을 완충하기 위해 존재한다. 시장 안정을 위해 재량 있게 운용할 필요가 있는 특수한 자금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필요할 때 수십조원을 움직인 뒤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아도 되는 돈은 아니다. 거래 세부를 공개할 수 없다면 최소한 대규모 장외거래의 목적과 운용 원칙, 기금에 미치는 영향 정도는 국회가 사후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외환정책에는 두 가지 절제가 함께 필요하다. 시장에 개입하되 가격을 정하려 해서는 안 되고, 비밀을 지키되 원칙까지 감춰서는 안 된다.
 
200억 달러 매입이 단기적인 수급 충격을 흡수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외환시장 안정이라는 정책목표에 부합할 수 있다. 반면 원화 가치를 일정 수준 아래로 묶어두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외환당국이 설명해야 할 것은 개별 거래의 세세한 조건이 아니라 바로 이 경계다.
 
‘논어’ 안연편은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 즉 신뢰가 없으면 나라가 설 수 없다고 했다. 금융시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환율은 숫자로 표시되지만 그 숫자를 떠받치는 것은 결국 정책에 대한 신뢰다.
 
외환당국이 가진 가장 큰 힘이 언제나 외환보유액인 것은 아니다. 예측 가능한 원칙 역시 강력한 외환정책 수단이다.
 
SK하이닉스가 미국 자본시장에서 265억 달러를 조달한 것은 한국 기업의 경쟁력이 만든 성과다. 그 거대한 자금이 국내 외환시장에 일시적인 충격을 줄 우려가 있었다면 당국이 이를 완충하는 것 역시 정책의 영역이다.
 
다만 시장안정이라는 이름이 모든 개입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외환당국이 지켜야 할 것은 특정한 환율이 아니라 환율이 제 가격을 찾아갈 수 있는 시장의 질서다.
 
로이터가 보도한 200억 달러 거래가 사실이라면 이제 당국이 밝혀야 할 것도 거기에 있다. 왜 개입했고, 어떤 원칙을 적용했으며, 같은 상황이 다시 오면 어떤 기준으로 움직일 것인가.
 
시장에는 비밀이 필요하다. 정책에는 원칙이 필요하다. 외환당국이 지켜야 할 마지막 자산은 달러가 아니라 그 원칙에 대한 신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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