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일보] 세계 해운회사들이 운항하는 선박이 모두 자기 소유인 것은 아니다. 선주기업이 배를 구입해 장기간 빌려주고 해운회사는 용선료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선박을 확보한다. 선박 구입자금은 금융기관에서 조달하고 용선료 수입으로 대출금을 상환한다. 권혁 시도그룹 회장이 세계 해운시장에서 성장시킨 사업도 이러한 국제 선주사업이다.
권 회장은 일본에서 선박을 사용할 해운회사를 먼저 확보하고 금융기관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유럽 금융시장까지 거래를 넓히며 다양한 선종의 선박을 확보했다. 세계 해운회사들의 수요를 파악하고 해외 금융기관과 거래를 성사시키면서 국제 선주사업을 확대해 왔다.
◆ 선박 소유국 1위 그리스…한국도 세계 6위
그리스는 대규모 상선 건조시설을 갖추지 않았지만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박을 소유한 국가다. 그리스 선주기업들은 한국과 중국, 일본 등의 조선소에서 선박을 건조하거나 중고선을 매입해 세계 해운회사에 빌려준다. 선박 가격과 용선료의 변화를 살피며 매입과 매각 시기를 결정하고 장기 임대계약을 통해 수익을 얻는다.
일본은 조선업과 선주사업을 함께 발전시켜 왔다. 종합상사와 금융기관들이 선주기업에 자금을 공급하고, 선주기업은 해운회사와 장기 용선계약을 체결해 투자금을 회수한다. 안정적인 용선료 수입과 선박의 담보가치를 인정받으면 자기자본이 부족한 사업자도 금융기관에서 선박 구입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한국도 세계적인 조선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선박 소유 규모에서도 주요 해운국에 속한다. 조선소는 선박을 건조해 대금을 받지만 선주기업은 배를 소유해 장기간 임대수익을 얻는다. 선박 가격과 금융비용, 용선료는 물론 계약 종료 이후의 자산가치까지 고려해야 하는 사업이다.
권 회장이 1990년대 초 일본에서 선주사업에 뛰어들 수 있었던 배경에도 당시 일본의 금융환경이 있었다. 장기 용선계약을 확보한 선주에게 선박 구입자금을 공급하는 금융거래가 활발했기 때문이다.
권 회장은 1990년 현대자동차를 떠난 뒤 일본에서 독립적인 선주사업을 준비했다. 현대자동차 재직 당시 수출 차량의 해상운송 업무를 담당하며 일본 선사들과 거래해 온 경험이 있었다. 선박을 직접 구입할 자본은 부족했지만 해운업계에서 쌓은 인맥과 거래 경험을 활용할 수 있었다.
일본 종합상사 마루베니와의 거래도 당시 추진됐다. 권 회장은 자동차 수출 증가로 운반선 수요가 확대되던 상황에 주목해 현대상선과 장기 용선계약을 추진했다. 일본에서 선박을 확보해 현대상선에 빌려주고 계약에 따른 용선료 수입으로 선박 구입자금을 상환하는 방식이었다.
금융기관은 선박을 담보로 자금을 빌려주기 전에 배를 사용할 해운회사의 신용도와 계약기간, 예상 용선료를 검토한다. 장기간 선박을 사용할 고객이 확보되면 대출금 회수 가능성도 판단할 수 있다. 현대상선과의 장기 용선계약이 일본에서 선박금융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유다.
마루베니의 지원을 확보한 권 회장은 1993년 일본 도쿄에서 독립적인 선주사업을 본격화했다. 선박을 직접 운항하는 대신 해운회사에 임대해 용선료를 받았다. 계약을 이행하면서 일본 금융기관과 거래를 이어갔고 새로운 선박을 확보할 때도 기존 거래에서 쌓은 신용을 활용했다.
일본에서 시작한 금융거래는 유럽으로 확대됐다. 자동차운반선뿐 아니라 벌크선과 유조선, 컨테이너선으로 선종도 다양해졌다. 해운회사마다 필요한 선박과 용선기간이 달랐고 금융기관의 대출 조건도 제각각이었다. 권 회장은 선박 구입가격과 금융비용, 용선료를 따져 거래를 성사시켰다.
선단이 커지면서 투자 위험도 늘어났다. 해운경기가 나빠지면 선박 가격과 용선료가 떨어지고 장기 계약이 끝난 뒤 새로운 임차인을 확보하기도 어려워진다. 선박의 소유권과 담보권, 계약상 책임을 관리하는 일도 복잡해졌다. 국제 해운업계에서는 이러한 거래를 관리하기 위해 개별 선박마다 별도의 법인을 설립하는 방식을 활용하고 있다.
◆ 해외법인 활용한 선주사업…그리스 코스타마레의 사례
국제 선주기업들은 선박을 소유할 특수목적법인(SPC)을 설립해 금융거래와 자산을 관리한다. 선박마다 별도의 법인을 두는 이른바 '1선박 1회사' 방식이다. 선박을 소유한 법인은 금융기관에서 자금을 빌리고 해당 선박에 담보권을 설정한다. 선주기업은 선박별 투자금과 채무를 구분해 관리할 수 있다.
그리스계 선주기업 코스타마레(Costamare)는 리베리아와 마셜제도 등에 설립한 100여 개 자회사를 통해 선박 소유와 금융거래를 관리하고 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보유 선박을 금융기관 차입금의 담보로 활용하고 MSC와 머스크 등 세계적인 해운회사에 장기간 임대해 용선료를 받고 있다.
코스타마레가 2026년 2월 기준 보유하거나 건조 중이던 컨테이너선은 79척이었다. 당시 기존 용선계약에 따른 향후 예상 수입은 약 36억달러에 달했다. 선박을 소유한 해외 자회사와 금융기관, 화물운송을 담당하는 해운회사가 각각 계약을 맺고 사업을 운영하는 방식이다.
시도그룹도 일본과 홍콩 등 해외에 사업 기반을 두고 세계 각국의 해운회사 및 금융기관과 거래해 왔다. 기업마다 법인 운영 방식은 다르지만 국제 선주사업에서는 여러 나라에 걸친 선박 소유와 금융거래, 장기 용선계약을 관리해야 한다. 해외 금융기관과의 거래 경험이 선주사업을 확대하는 데 중요한 이유다.
◆ 국내 선박금융 외국계 비중 66%…민간자본 확대 과제
국내에서는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이 선박 건조와 도입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한국해양진흥공사도 국적선사의 선박 확보와 경영 안정을 위해 투자와 보증, 선박공급사업 등을 운영한다. 필요한 선박을 직접 확보해 국적선사에 장기간 빌려주는 사업도 수행하고 있다.
국내 선박금융 시장에서는 외국계 금융기관의 역할이 크다. 한국해양진흥공사가 지난 6월 발표한 '2025년 선박금융 현황'에 따르면 조사 대상 국적선사 100개사의 신규 선박금융 실행액 가운데 외국계 금융기관이 차지한 비중은 66%였다. 국내 정책금융은 27%, 민간금융은 7%로 집계됐다.
외국계 금융기관의 비중은 전년보다 3%포인트 높아졌다. 국내 민간금융은 2024년 3%에서 지난해 7%로 상승했지만 외국계 금융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선박 투자에 필요한 장기자금을 국내 금융시장에서 더 많이 공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해외 금융기관의 자금을 활용하는 것은 국제 선주사업에서 일반적인 일이다. 다만 국내 금융기관의 참여가 확대되면 한국 선주기업들이 선박을 확보할 때 자금 조달 경로를 다양화할 수 있다. 금융기관이 해운경기와 선박의 담보가치, 용선계약의 수익성을 평가하고 선주기업은 안정적인 거래처를 확보해야 한다.
국내 정책금융은 국적선사의 선박 확보와 경영 안정을 지원해 왔다. 국제 선주기업은 사업 대상을 세계 각국의 해운회사로 넓혀 장기 용선계약을 맺고 필요한 자금을 조달한다. 한국의 조선·해운 경쟁력을 바탕으로 이러한 민간 선주기업을 육성하려면 국내 금융기관의 참여와 해외 거래처 확보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 해외 금융으로 250척 선단 일궈…한국 조선소에 121척 발주
권 회장은 일본과 유럽 금융기관에서 자금을 조달해 세계 각국의 해운회사에 선박을 공급하는 사업을 확대했다. 장기 용선계약을 통해 선박 수요를 확보하고 금융기관에서 건조·매입자금을 마련했다. 이러한 거래를 이어가며 확보한 선단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건조 중인 발주 선박을 포함해 약 250척 규모에 이르렀다.
선단 확대는 국내 조선소의 대규모 수주로도 이어졌다. 권 회장은 국내 조선소에 신조 선박 121척, 총 71억5000만달러 규모의 건조계약을 체결했다. 일본과 유럽 금융시장에서 조달한 자금을 국내 선박 발주에 투입하고, 건조된 선박을 세계 각국의 해운회사에 장기간 임대하는 사업을 펼쳤다.
선주기업이 선박을 발주하려면 조선소와 건조가격, 인도 시기 등을 협의해야 한다. 해운회사와의 용선계약을 통해 향후 수입을 확보하고 금융기관과는 자금 조달 및 상환 조건을 결정해야 한다. 권 회장은 세계 해운회사와 금융기관, 한국 조선소 사이에서 이러한 거래를 성사시켰다.
선박 건조계약은 조선소뿐 아니라 엔진과 철강재, 전기·전자설비 등을 생산하는 기자재 업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권 회장이 해외에서 확보한 금융자금은 국내 조선소의 건조계약으로 이어졌고, 완성된 선박은 세계 각국의 해운회사에 공급됐다. 선박을 소유하는 선주사업이 국내 조선산업과 연결된 사례다.
권 회장이 일본에서 시작한 선주사업을 세계시장으로 확대할 수 있었던 데에는 해운회사의 수요를 읽고 금융기관을 설득하는 능력이 있었다. 선박을 확보할 자금을 마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장기간 사용할 고객까지 확보했다.
한국은 세계적인 조선 기술을 갖추고 있으며 국제 선박 소유시장에서도 주요 국가로 자리 잡았다. 권 회장은 해외 금융기관과 세계 해운회사 사이에서 사업을 성사시키며 한국 조선소에 대규모 선박을 발주했다. 국제 선주사업에서 쌓아온 권 회장의 경영 경험과 실제 발주 실적은 한국 조선산업이 세계 금융시장과 해운회사를 상대로 사업을 넓혀온 과정의 한 부분을 보여준다.
[아주경제 2026년 11월 3일자 14면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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