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일보] 2005년 12월 도입된 퇴직연금이 20년을 넘겼다. 국민의 안정적인 노후를 위해 마련한 제도는 이제 500조원이 넘는 거대한 금융시장으로 성장했다. 은행과 증권사, 보험사에는 주요 수익원이 됐지만 정작 평생 일하며 퇴직급여를 쌓아온 노동자들의 노후가 얼마나 나아졌는지는 의문이다. 금융회사들이 확보한 운용자산과 수수료 수입은 늘어났지만, 그 돈의 주인인 노동자에게 돌아간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퇴직연금 적립금은 501조4000억원으로 전년보다 약 70조원 증가했다. 연간 수익률도 6.5%로 제도 도입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전체 적립금 가운데 실적배당형 상품 비중은 24.6%에 그쳤다. 가입자별 수익률도 상위 10%는 19.5%에 달했지만 하위 10%는 0.5%에 머물렀다. 금융 지식과 투자 경험에 따라 노후자산의 증식 기회마저 크게 달라지는 현실이다.
퇴직연금은 일반적인 투자상품과 성격이 다르다. 노동자가 오랜 기간 일하며 쌓아온 후불임금을 퇴직 이후 지급하기 위해 관리하는 제도다. 그렇다면 운용과 관리에 참여하는 금융회사에도 그에 걸맞은 책임이 따라야 한다. 투자손실을 모두 금융회사에 부담시킬 수는 없지만, 가입자의 이익보다 자금 유치와 수수료 수입을 우선하는 영업 관행이 자리 잡지 않도록 감독할 책임은 금융당국에 있다.
퇴직연금 계약이 체결되는 과정도 살펴볼 대목이다. 상당수 기업은 금융회사와 퇴직연금 계약을 체결하고, 노동자는 그 계약에 따라 노후자금을 적립한다. 금융회사들이 기업의 계약을 유치하는 데 집중할 경우 실제 퇴직급여의 주인인 노동자의 장기 수익률과 수수료 부담이 뒷전으로 밀릴 우려가 있다. 금융당국은 사업자별 장기 순수익률과 실질 비용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가입자가 불리한 계약과 상품을 제대로 비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더 큰 문제는 퇴직연금이 노후소득으로 충분히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퇴직연금 수급을 시작한 60만1000명 가운데 83.5%가 일시금을 선택했다. 연금으로 받은 사람은 16.5%에 불과했다. 주거비와 생활비 등 목돈이 필요한 노동자의 현실을 고려하더라도 퇴직연금이 은퇴 이후 안정적인 소득을 제공한다는 당초 취지는 여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적립금 규모가 커졌다는 정부의 발표만으로 제도의 성과를 평가하기 어려운 이유다.
정부와 국회는 수익률 개선을 위해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전문기관이 적립금을 공동 운용하면 장기적인 투자성과를 높일 여지가 있다. 그러나 운용기관이 달라지는 만큼 권한과 책임에 관한 법률적 기준도 엄격해져야 한다. 공공기관이 맡든 민간 금융회사가 운용하든 가입자의 이익을 우선하는 충실의무와 선관주의의무를 구체화하고, 이해충돌과 의무 위반에 따른 책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정책사업 지원이나 금융회사의 영업상 이익이 노동자의 재산권보다 앞서도록 허용해서도 안 된다.
퇴직연금 20년 동안 금융회사는 500조원이 넘는 시장을 확보했다. 이제 정부와 국회가 따질 것은 운용기관의 확대나 시장의 성장 가능성만이 아니다. 노동자의 퇴직급여를 맡아 수익을 얻는 금융회사에 어떤 책임을 지우고, 그 책임을 다하지 않았을 때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지부터 법률과 감독 제도에 담아야 한다. 국민의 노후자금을 운용할 권한은 금융회사의 영업상 이익보다 노동자의 재산권 보호를 앞세울 때 비로소 정당성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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