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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공급망이 무기가 된 시대, 경제안보는 실행으로 증명해야 한다

송정훈 기자 2026-11-06 15:00:00

경제안보품목 340개로 확대·조기경보체계 가동 추진…정부는 공급망 다변화 성과와 대응 책임 명확히 해야

[사진=AI 생성 이미지]

[경제일보] 세계경제에서 값싼 원료를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일은 더 이상 당연한 일이 아니다. 반도체를 만들 기술과 자본이 있어도 생산장비의 반입이 막히면 공장은 멈춘다. 전기차를 생산할 능력이 있어도 핵심 광물과 배터리 소재를 확보하지 못하면 생산계획을 다시 짜야 한다. 지난 수십 년간 비용과 효율을 기준으로 구축된 국제 분업체제가 이제 국가안보와 외교의 논리에 따라 흔들리고 있다. 공급망이 경제를 움직이는 통로에서 상대국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바뀐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경쟁은 이런 변화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미국은 첨단 반도체와 제조장비의 대중국 수출을 통제하고, 중국은 희토류를 비롯한 핵심 광물의 공급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양국에 생산시설과 고객사를 둔 한국 기업으로서는 어느 한쪽의 정책 변화도 가볍게 넘길 수 없다. 정부의 통상 대응 능력이 기업의 투자와 생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시대가 됐다.
 
자원을 보유한 국가들의 움직임도 달라지고 있다. 5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독일의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는 유럽 차원의 핵심 원자재 비축과 공급선 다변화 필요성을 강조했다. 같은 날 브라질에서는 희토류 등 전략광물을 원료 상태로 수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국 내 정제와 가공, 제조업 육성으로 연결하려는 정책이 추진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자원 확보 경쟁이 광산 개발을 넘어 정제기술과 산업 주도권 확보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이런 변화에 취약한 산업구조를 갖고 있다. 세계적인 반도체와 배터리, 자동차 생산 능력을 보유했지만 일부 핵심 원료와 소재의 해외 의존도가 높다. 특정 국가의 수출 제한이나 물류 차질이 발생하면 국내 기업이 생산 일정을 조정해야 하는 위험도 존재한다. 공급망의 안정은 개별 기업의 비용 관리 문제가 아니라 국가 산업경쟁력을 지키는 기본 조건이 됐다.
 
그렇다고 정부가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공급망안정화법을 시행하고 경제안보품목 관리와 공급망안정화기금, 범정부 협의체 등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지난 10월에는 관리 대상 경제안보품목을 327개에서 340개로 늘리고, 중점관리품목을 별도로 선정하는 방안도 발표했다. 범부처 통합 조기경보시스템의 시범운영도 추진하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관리 대상 품목이 늘었다고 공급망이 그만큼 안전해졌다고 볼 수는 없다. 위험을 감지하는 시스템이 있어도 대체 공급처를 확보하지 못하면 기업의 생산 차질을 막기 어렵다. 비축 물량이 충분해 보여도 실제 산업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규격과 품질을 갖추지 못했다면 실효성이 떨어진다. 정부는 제도를 얼마나 만들었는지가 아니라 위기가 발생했을 때 생산 중단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는지로 평가받아야 한다.
 
공급망 관리의 출발점은 취약성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이다. 핵심 품목의 특정 국가 의존도와 국내 재고, 대체 조달에 필요한 시간, 정제·가공 능력 등을 함께 살펴야 한다. 위험 수준이 높은 품목에는 우선순위를 정해 대응해야 한다. 모든 원료를 국내에서 생산하거나 모든 수입선을 단기간에 바꾸겠다는 접근은 현실적이지 않다. 공급망 다변화에는 비용이 들고, 대체 공급처를 확보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제시할 것은 실현 가능성이 불분명한 일률적 목표가 아니라 품목별 실행계획이다. 향후 6개월 안에 중점관리품목의 위험 평가와 대응 우선순위를 점검하고, 1년 안에 대체 공급계약과 비축 확대 등 가시적인 진전이 있는지 공개적으로 평가하는 방안을 검토할 만하다. 다만 이 기간은 새로운 법정 의무가 아니라 정책적 권고 시한이다. 광산 개발이나 정제시설 건설처럼 장기간이 필요한 사업에는 별도의 중장기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정부 조직의 책임도 분명해야 한다. 현행 법률에 따라 공급망안정화위원회는 재정경제부 장관을 중심으로 관계 부처의 정책을 심의·조정한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산업별 수급과 핵심 자원 확보, 외교부는 자원 보유국과의 협력,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전략기술 육성에서 각각 역할을 맡고 있다. 대통령실은 국가안보와 산업정책이 충돌하는 사안에서 범정부적 조정을 뒷받침해야 한다. 이미 법정 조정기구가 있는 만큼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것보다 기존 체계의 의사결정 속도와 집행 책임을 높이는 일이 우선이다.
 
특히 공급망 위기에서는 시간이 중요하다. 특정 품목의 수출 제한이 발표됐을 때 어느 부처가 기업의 재고를 확인하고, 누가 대체 공급처 확보를 지원하며, 비축 물량 방출은 어떤 절차로 결정하는지 명확해야 한다. 부처마다 정보를 따로 보유하거나 판단을 미루는 동안 기업의 생산라인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조기경보시스템의 성패도 위험을 얼마나 빨리 발견하느냐뿐 아니라 그 정보가 실제 대응으로 이어지느냐에 달려 있다.
 
자원 외교 역시 선언보다 계약과 물량으로 평가해야 한다. 호주와 중남미, 아프리카 등 자원 보유국과의 협력을 확대하되 광산 지분 확보만으로 성과를 판단해서는 곤란하다. 채굴한 광물을 정제하고 가공해 국내 생산현장까지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 장기 구매계약과 현지 가공시설 투자, 운송망 확보가 함께 검토돼야 한다. 정부는 민간기업이 단독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을 분담하되 사업성 검증과 사후 관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경제안보라는 명분이 부실투자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기술 경쟁력도 공급망 안정의 중요한 축이다. 한국이 대체하기 어려운 반도체와 배터리, 첨단 소재·장비 기술을 확보할수록 국제 협상에서 선택의 폭은 넓어진다. 그러나 기술력이 뛰어나다는 이유만으로 원료 공급의 불안정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연구개발과 인재 양성, 핵심 광물 확보와 공급망 다변화가 함께 진행돼야 한다. 정부는 전략산업 지원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기업은 장기적인 기술투자와 위험 관리에 책임을 져야 한다.
 
국회의 역할도 가볍지 않다. 이미 마련된 법률과 기금이 목적에 맞게 집행되고 있는지 점검하고, 필요한 제도 개선과 예산 지원을 뒷받침해야 한다. 정부의 성과평가에는 공급선 다변화 실적과 비축의 실효성, 위기 대응에 걸린 시간 등을 반영할 필요가 있다. 다만 기업의 구매계약과 원가, 민감한 기술정보까지 무분별하게 공개하도록 요구해서는 안 된다. 국민이 알아야 할 정책 성과와 보호해야 할 산업기밀은 구분돼야 한다.
 
<손자병법> ‘구변편’에는 '상대가 오지 않을 것만 믿지 말고, 내가 대비돼 있음을 믿으라(無恃其不來 恃吾有以待也)'는 구절이 있다. 공급망 관리의 본질도 다르지 않다. 수출통제가 완화되기를 기대하거나 국제정세가 안정되기만 기다리는 것으로는 산업을 지킬 수 없다. 위기가 닥치기 전에 대체 공급선을 확보하고, 기술과 생산 기반을 갖춰야 선택의 여지가 생긴다.
 
전략적 자율성은 모든 것을 국내에서 생산하겠다는 자급자족론이 아니다. 동맹과 국제 분업의 이점을 활용하면서도 특정 국가나 단일 공급 경로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는 능력이다. 협력할 때는 협력하고, 외부의 압박이 발생했을 때는 충격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국가의 선택권은 선언이 아니라 산업과 기술, 자원 확보 능력에서 나온다.
 
이제 정부는 공급망 정책의 성과를 국민과 기업이 확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경제안보품목을 얼마나 지정했는지보다 실제 위험을 얼마나 줄였는지, 기금을 얼마나 조성했는지보다 어떤 공급망을 안정시켰는지 설명해야 한다. 대통령실은 범정부 조정을 뒷받침하고, 관계 부처는 소관 정책을 실행하며, 국회는 그 결과를 검증해야 한다.
 
공급망이 무기가 된 시대에 국가가 지켜야 할 것은 공장과 기술만이 아니다. 외부의 압박 앞에서도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경제적 자율성이다. 그 힘은 정부의 선언이 아니라 평상시에 축적한 준비와 위기 때 입증한 실행력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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